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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의 경쟁력]⑤ 민주당 정세균 대표의 ‘장학금’

입력 | 2008-10-12 10:51:00

정세균 민주당 대표.

정세균 민주당 대표.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장학금이었다."

이 남자, 가끔은 고루한 '샌님'처럼 보인다. 게다가 고운 인상은 물론이고 예전 쌍용그룹에서 상무이사를 지냈다는 이력까지 떠올리면 '원래 돈 깨나 있는 집안 출신일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웬걸, 정세균(58) 민주당 대표가 어쩌면 이명박 대통령보다 더 힘겨운 학창시절을 보냈다는 얘기가 여의도에서 흘러나왔다. 어린 시절 굶기를 밥 먹듯이 했고, 고학으로 미국 MBA까지 따내 대기업 이사까지 거친 집념의 사나이라는 것. 그런 노력 덕분인지 그는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후 내리 4선 국회의원과 장관까지 지낸 성공한 정치인 반열에 올랐다.

평범한 샐러리맨에서 시작해 제1야당 대표까지 됐으니, 무언가 범상치 않은 내공이 숨어 있으리란 희망을 안고 그를 만났다.

● 부모님은 빈농(貧農), 7남매 중 셋째…

그의 고향은 전북 진안이다. 통상 '무진장(무주·진안·장수)'으로 불리며 대한민국 3대 오지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곳이다. 스스로도 "산토끼와 발맞추고 노루를 쫓아다니며 자랐다"고 말한다. 인상에서 엿보이는 '부잣집 도련님' 이미지와는 영판 다른 성장과정이다.

- 부잣집 출신은 아니군요.

"물론이죠. 4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는데, 둘째 누나가 초등학교 졸업학력이 전부일 정도로 힘겹게 자랐습니다. 당시는 밥 세끼를 다 먹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없이 살았잖아요. 요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가난을 겪은 세대입니다."

소년 정세균은 '공부깨나 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궁벽한 동네였기 때문에 정식인가를 받은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가까스로 고등국민학교를 나온 그는 검정고시를 치르고서야 중학교 졸업 자격증을 얻었다고 한다. 그 뒤 장학금을 받고 무주에 신설된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갓 설립된 학교에서 6개월을 보낸 그는 일생일대의 모험을 꿈꾸기 시작했다. 인근 교육도시인 전주로 유학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

"생각해보니 무주에서 공부해선 제 밥벌이도 못할 것 같습디다. 그래서 전주공고로 재입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엔 공고를 나오면 취업이 잘 된다는 말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다시 시험을 쳐서 8등으로 공고에 입학을 한거죠."

전주공고에 입학한 뒤 치른 첫 시험에서 그는 전체 1등을 했다. '촌놈'의 실력이 도시에서도 통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더 큰 욕심이 생겼다. '취업이 아니라 대학 진학을 해보자'는 야심(?)이 바로 그것이다.

도시로 유학 온지 6개월 만에 그는 대학 진학의 꿈을 이룰 학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전주에서는 최고 명문고인 전주고와 다수의 후발학교들이 경쟁하고 있었다. 공고 재학생인 자신을 쉽게 받아줄만한 학교를 수소문한 끝에 신흥고로 목표를 세우고 어느 날 직접 신흥고 교장실에 쳐들어갔다.

전주공고 1등 성적표를 신흥고 교장 앞에 꺼내놓은 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전주공고에서 1등을 한번도 놓친 적이 없는 정세균이라고 합니다. 신흥고등학교를 다니고 싶은데 장학금을 안 주시면 학교에 다닐 형편이 못됩니다. 장학금을 주시고 전학을 허락해 주십시오."

낯선 학생의 당돌한 요청을 조용히 듣던 교장은 교감을 부르더니 "이 학생 테스트 해봐요"하고 말했다고 한다.

"참 숫기 없던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테스트를 받고 그날로 신흥고 학생이 됐지요."


▲ 영상취재 : 박태근 동아닷컴 기자

● "교장선생님 저를 뽑아주시되, 장학금은 꼭…"

신흥고에서는 장학금을 주는 대신 휴식시간과 방과 후 시간에 학교 매점을 관리하는 '근로장학생'의 지위를 부여했다. 부모로부터 학비를 지원받을 수 없는 그로서는 고맙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조건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일을 해야 했던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3년 내내 문과 1등을 유지했다.

- 공부에 소질이 있었던 건가요?

"글쎄요. 압도적으로 우수한 학교를 다닌 것은 아니었잖아요. 아마도 가난이 너무 힘들어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본능 같은 게 꿈틀댔나 봅니다. 공부만 잘해도 가난을 극복하고 나중에 훌륭한 사람도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으니까요."

- 대학도 장학금을 받고 다녔나요?

"허허, 국립대를 갔다면 좋았겠지만 두 번이나 미끄러졌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립대학 (고려대 법대)에 가야 했는데 학비가 비싸니까 입학식 다음날부터 입주과외 교사로 일했어요. 그 때만 조금 고생하고 이후에는 줄곧 장학금을 받고 다녔지요. 생활이 어려운 학생에게 주던 장학금도 있었고, 대학신문 기자 활동을 해서 받은 장학금, 그리고 대학 3학년 때는 총학생회장이 되어 장학금을 받았어요. 결과적으로 장학금으로 대학을 다닌 셈이죠."

그의 꿈은 어릴 적부터 정치인을 향해 있었다. 대학 시절에는 대학신문 기자와 총학생회장 활동으로 유신체제에 저항하며 그 꿈을 구체화했다. 대학졸업 이후 언론계에 먼저 입문한 뒤 정치인으로 변신하겠다는 게 그가 구상한 인생항로였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첫 직장은 쌍용그룹 계열사였다.

- 왜 기업체로 행로를 바꾼 건가요?

"대학을 마치고 동아일보에 입사하려고 했는데 1975년도에 동아일보 광고사태가 터졌어요. 이후로도 채용 계획이 없으니 계획이 흐트러진 거죠.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어 호구지책으로 기업체 취직을 준비한겁니다. 대신 자기계발을 위해 해외에서 일할 수 있는 종합상사로 목표를 분명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미국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8년7개월 동안 쌍용그룹의 종합상사 주재원으로 일했다. 이국에서도 '장학금'을 향한 그의 욕심은 멈추지 않았다. 사내 경쟁을 통해 해외 유학비 지원 대상 사원으로 선정된 것. 뉴욕 주재원 시절에는 NYU에서 행정학을 공부하고 로스앤젤레스 주재원 시절에는 페퍼다인 대학에서 MBA를 취득하는 뚝심을 발휘했다.

그는 이 시절을 회고하며 "일하랴 숙제하랴 완전 초죽음 상태였다"고 몸서리쳤다. 그럼에도 "수 천만 원의 학비를 회사에서 지원 받은 아주 운 좋은 케이스였다"고 자랑스러워한다.

● 돈 한 푼 안들이고 초등학교에서 대학원까지…

장학금을 받아 '샐러던트(직장인+학생)'로 살아가던 정세균은 보통 직장인이 생각할 수 없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처음 월급을 받던 달부터 월급의 5분의 1을 떼어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렇게 27살인 1978년 '대양장학회'를 만들었고 31살에는 스스로 이사장에 취임했다.

- 어떻게 그 나이에 장학회 만들 생각을 한 건가요?

"허허. 제 고향에 뭔가 기여를 좀 하고 싶더군요. 장학회라고 하니 거창하게 들리지만 단 한 사람에게 학비 정도를 대준 것에 불과했어요. 그리고 청계천에 가서 책을 사서 보냈어요. 또 진안에 여자 고등학교가 하나 생겼다기에 중고 피아노를 사서 보내주기도 했지요. 그렇게 조금씩 커 나간 거지요."

혼자 힘으로 벅차니 '동지'들의 규합에 나섰다. 그의 뜻에 동참하는 지인들이 봉급의 일부를 이 장학회에 기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장학사업이 올해 30년째다. 현재 장학회의 혜택을 입는 학생들은 매년 50여명에 이른다. 중고생 학자금 정도의 지원일 뿐이지만 농촌지역 학생들에게는 그 정도의 지원도 매우 요긴하다. 그는 매년 1000여만 원의 돈을 장학회에 기부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쯤에서 기자의 삐딱한 심사가 발동했다. 장학회를 거쳐 간 후배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의 정치적 밑천이 된 것이 아닐까. 30년에 걸친 기부는 정치적 야망으로 계획된 행동에 불과한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긴 것이다. 딴죽을 걸기 시작했다.

- 솔직히 그런 행동이 반드시 '순수한' 마음에서만 비롯됐다고 자신할 수 있나요?

"허허. 그런가요?"

- 좀 더 솔직하게 말씀해주시죠.

"맞아요. 맞습니다. 20대에 정치인이 되려는 꿈을 품었으니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내 고향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해놓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에요. 미리미리 정치인 준비를 한 셈이랄까요? 인정합니다. 허허."

선선히 "인정한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이 장학회 출신들이 활발히 뛰어서 나를 국회의원으로 밀어준 것도 아니에요. 40대 후반에 정치인으로 변신해서 공천을 받으려 내려가니 자연스레 지역에서 '낙하산 공천' 논란이 일더군요. 그런데 지역 주민들이 장학회 얘기를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그리곤 더 이상 '낙하산' 얘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뭐 그 정도 혜택을 받았다고나 할까요?"

정치인으로부터 이 같은 솔직한 답변을 듣고 나니 이런 질문을 한 기자 스스로도 조금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의도가 정치적이건 아니건, 누가 보건말건 30년 동안 꾸준히 기부를 해온 정치인은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 20대에 시작한 장학사업을 30년간

- 미국에서 보고 배운 것도 한몫했을 것 같군요.

"미국에서 오래 살다보니 그 나라의 활발한 기부문화가 참 부럽더군요. 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신이 받은 혜택을 그대로 사회에 돌려준다는 것은 꼭 필요한 일 같아요. 우리 주위에 장학금 혜택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다들 자신이 잘나서 장학금 받은 것으로 착각한다니까요."

맞는 얘기다. 그의 인생 항로를 따라가다 보니 그를 키운 것의 8할이 장학금이라는 말이 허풍은 아닌 듯 했다. 농촌청년이 교육을 통해 대기업 이사를 거쳐 국회의원과 제1야당의 대표가 되는 과정은 이렇게 장학금을 매개로 드라마틱하게 전개됐다. 그런데 그 과정이 늘 그렇게 순탄하기만 했을까.

- 아무리 공부를 잘했어도 민감한 사춘기 시절에 교내매점에서 아르바이트 하면서 동시에 자존심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맞습니다. 오히려 힘들었던 건 제가 그리 뻔뻔한 스타일이 아니었다는 점이에요. 소심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약점도 훈련을 통해 극복 되더군요. 고등학교 때 매점에서 일했다면, 대학 다닐 때는 학비를 벌려고 전주에서 인삼행상을 했어요. 그런 경험이 쌓여 대학 총학생회장도 하고 낯선 미국에서 종합상사 맨으로 뛰어다닐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싶네요. 또 한 가지는 제가 아주 어렵고 가진 것이 없어도 한번도 자존심이나 자신감을 잃어 본 적이 없다는 점이겠죠."

- 긴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돈 한 푼 안들이고 공부하고 성공한 셈이군요.

"맞습니다. 정말 남의 돈 가지고 공부했군요. 허허"

- 마지막으로 정치인으로서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좋은 일을 했다고 신뢰 받는 정치인이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목표라면 나의 인생을 거울삼아 '양극화 문제'를 어떻게든 해소하고 싶다는 겁니다. 성장은 필요하지만 '질 좋은 성장'이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정치적 화두입니다."

그를 인터뷰 하면서 기자도 성장과정에서 남들만큼 받았던 혜택이 떠올랐다. 개인이 잘 나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선의가 구석진 곳까지 잘 스며들도록 서로 돕는 힘으로서의 혜택. 그 혜택을 후배들에게 되돌려주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할 일이라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이 이번 인터뷰의 최대 수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관련연재] 이 남자, 이 여자의 경쟁력

정호재 기자demi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