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혜성(가수) 콘서트 티켓을 예매하고 파우더도 다시 사야 해요. 요즘 유행하는 체크무늬 남방도 갖고 싶어요. 이것만 해도 20만 원이 훌쩍 넘는데…. 엄만 고등학생이 돈 쓸 데가 어디 있느냐고 하지만 일주일 용돈 1만5000원으론 사흘도 못 버텨요.”
서울 신광여고 1학년 김모 양은 용돈 기입장을 쓰면서 한숨을 푹푹 쉰다. 용돈을 받자마자 친구에게 빌린 돈을 갚으면 3분의 1이 사라진다. 나머지 1만 원으로 학교 준비물이나 필기구(거의 모든 제품이 500원 이상이다), 떡볶이와 순대 값을 내면 사나흘 만에 용돈은 바닥난다.
이뿐인가. 정신적 건강과 원만한 대인관계를 위해 지출해야 하는 여고생의 ‘품위 유지비’도 적지 않다.
유난히 공부에 지치는 날이면 ‘별 다방’(스타벅스) 커피 한잔(4000원대)으로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사기 충전을 해야 한다. 좋아하는 그룹 ‘빅뱅’의 대형 브로마이드가 선물로 제공되는 하이틴 잡지(3000∼4000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TV를 맘껏 볼 수 없는 만큼 사진이라도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삼아야 하기에.
시험이 끝난 날은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친구들과 노래방(보통 4명이 함께 가면 1인당 2000∼3000원씩을 낸다)도 가야 한다. 이날만큼은 떡볶이에서 벗어나 스파게티나 피자를 먹으며 분위기를 내야 한다.
친한 친구의 생일이나 ‘빼빼로 데이’와 같은 행사가 있는 주에는 5000원 이상을 더 지출한다. 또 한 달에 한 번은 극장에 가 영화(6500원)도 봐야 하고, 간간이 찾아오는 친구 커플의 기념일(만남 50일 기념일 같은)에는 친구끼리 1000원씩 모아서 ‘축의금’도 전달해야 한다. 부모님으로선 쓸데없는 ‘돈 낭비’처럼 보이겠지만 또래 집단의 생리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강림하시는 ‘지름신’(‘충동구매’를 뜻하는 은어)을 이겨 내는 것도 쉽지 않다. 친구 따라 팬시점에 갔다가 ‘신상’(‘신상품’의 줄임말) 펜과 다이어리를 보고 확 사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에서 출시된 비비크림(화장한 티가 많이 나지 않아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을 할 수 있는 기초화장품), 파우더, 립글로스의 유혹도 뿌리치기 힘들 때가 있다.
김 양의 어머니는 학업에 불필요한 ‘쓸데없는’ 물건을 발견할 때마다 “용돈을 줄이겠다”고 엄포를 놓지만 김 양은 생각이 다르다. 가끔 공부와 상관없이 구입하는 작은 물건 하나가 기분 전환이나 슬럼프 극복에 도움이 될 수 있단 사실을 어머니는 왜 모르는 걸까?
모자라는 용돈, 그러면 어떻게 해결할까? 김 양이 애용하는 방법은 교통카드 충전비 빼돌리기. 어머니로부터 1만 원을 받아 7000원 어치만 충전하고 나머지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쓴다. 친구들 사이에 널리 사용되는 ‘필살기’다.
‘완전범죄’에 가까운 방법도 있다. 친구들끼리 돈을 모아 온라인 강의 수강신청을 한 뒤 한 명의 아이디를 돌려가면서 강의를 듣는다. 2명이 학교 급식비를 한 명분만 내고 밥을 함께 나눠 먹는 친구도 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임시변통일 뿐. 김 양은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어머니 몰래 은행계좌를 개설하고 체크카드를 만들었다. 설날이나 추석에 친척들로부터 받은 돈을 저금했다가 목돈이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쓴다. 체크카드를 이용하면 극장과 놀이공원에서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이번 달 김 양의 목표는 ‘나이키 조던’ 운동화. 3개월 전부터 차비와 군것질을 줄여왔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하루 8시간, 일당 2만4000원을 받는 예식장 아르바이트도 두 번이나 했다.
“이젠 저도 아이가 아니잖아요. 부모님이 주는 용돈에 맞춰 살기보다는 저축을 하거나 스스로 벌어 쓰고 싶은 데 쓰면서 살고 싶어요.”
김 양의 말이다.
이혜진 기자 leehj08@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