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가짜(시뮐라크르)’가 원본(原本)을 대체하고 있다고 주장한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말이 요즘 들어 실감나게 와 닿고 있다.
전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종이 달러는 약 4000억 달러 정도다. 이 돈 중 절반가량은 미국 내에, 나머지 절반은 미국 이외의 나라에 있다.
이 말은 기축통화국인 미국은 종잇조각에 불과한 달러화를 내주고 약 2000억 달러 이상의 해외자산을 거의 공짜로 구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종이돈을 받고 그만큼의 자국 자산을 미국에 내준 다른 나라들은 ‘달러’라 불리는 종이돈의 가치를 미국이 유지해 주는 대가로 미국이 그만큼의 이득을 보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실제 자산거래나 무역에 있어서 종이달러를 컨테이너 박스에 싣고 다니지 않아도 그것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종이 달러는 4000억 달러 정도에 불과하지만 달러로 거래되는 전 세계 금융자산의 규모는 약 300조 달러다. 실제 존재하지 않는 299조6000억 달러의 거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약속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세계 경제는 거대한 배를 한 척 팔면서도 컴퓨터로 ‘×000000달러’라는 숫자만 전달받고 이 숫자 중 몇 개의 ‘0’을 다른 곳에 옮겨주는 것으로 모든 절차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일을 하고 받는 등 근로의 대가도 몇 개의 ‘0’으로 돼 있고, 집을 사고, 차를 살 때도 ‘0’을 주고받는 같은 과정이 이뤄지고 있으니 세상은 이미 ‘0’이라는 기호가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때문에 경제는 ‘0’을 지켜주겠다는 약속과 약속이 첩첩이 쌓인 것이라 할 수 있고 이 약속을 지키는 ‘신용’을 잃는 것은 현대사회의 경제 전체가 무너지는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지금 세계 경제위기의 근원은 이 원본 지불에 대한 약속이 흔들린 것이다.
실제 달러 대신 ‘0’으로 거래하면서부터 사람들의 허파는 쉽게 풍선처럼 부풀었다. 그 결과 거품의 형성과 붕괴가 반복되는 것은 화폐경제의 필연적 과정이 됐다.
더구나 지금처럼 신용 자체에 대한 불신과 원본화폐인 달러 지불에 대한 회의, 심지어 달러가치에 대한 회의까지 들 때 거품의 붕괴가 증폭될 수밖에 없다.
결국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위기는 신용이 문제이지 얼마의 ‘0’을 덤으로 주느냐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에 열린 G20 회담에서는 또 한번 애꿎은 ‘시뮐라크르’만 덤으로 주겠다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말았다.
박경철 경제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