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적으로 쓰는 영어인데 정작 영어사전에는 등장하지 않는 단어가 있다. 스킨십, 핸드폰, 백미러 등등. 이런 콩글리시 가운데 스펙(spec)은 아마도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조어(造語)일 듯싶다. 스펙은 명세서라는 뜻의 영어 단어 ‘스페시피케이션(specification)’에서 유래된 말로 취업에 필요한 자격 조건을 의미한다. 대학생들은 토익 점수, 해외 연수, 자격증, 봉사활동, 인턴 경험을 흔히 ‘스펙 5종 세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학이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취업사관학교가 되다시피 한 탓에 학생들 간의 스펙 경쟁이 상상을 초월한다. 8월 현재 20대 백수가 106만 명이나 된다니 그럴 만도 하다. 더구나 미국발(發) 금융위기로 기업들이 신규 채용 규모를 줄이는 데다 이명박 정부 들어 공무원과 공기업 등 이른바 ‘신(神)이 내린 직장’도 개혁 바람을 피하지 못해 취업문은 더 좁아졌다. 취업준비생 100명에 3.8명꼴로 취업에 성공한다니 로또가 따로 없다.
▷그러다 보니 대학생들이 스펙 경쟁에 쏟아 붓는 돈과 시간이 엄청나다. ‘대학생 신분 유지’를 위해 졸업을 미루는 일은 예사고 좋은 학점을 얻기 위해 같은 과목을 재수강하는 ‘학점 세탁’도 흔하다. 일부 대기업이 자원봉사 경력에 헌혈을 포함하자 ‘대학생 헌혈’이 급증했다. 올해도 35%나 늘어 ‘군인 헌혈’을 제치고 연속 1위를 차지했다. 그야말로 ‘피를 팔아’ 직장을 구하는 셈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은 취업준비생들의 과도한 스펙 경쟁으로 인한 사회적 손실이 연간 2조850억 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했다.
▷취업을 위해 조금이라도 나은 스펙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스펙과 실제 취업의 상관관계가 낮다는 것이다. 모두가 좋은 스펙을 가지려고 애쓰다 보니 스펙이 오히려 평준화하고 있을 정도다. 대기업에서 사원 채용과 면접을 맡고 있는 한 인사 담당자는 “대다수 지원자가 이력서에다 해외 연수 경험이 ‘있음’으로 기재하다 보니 ‘가정형편 때문에 해외 연수를 가지 않았다’는 응시자들이 오히려 눈에 띄더라”고 말했다. ‘스펙 강박’에서 벗어나 취업 성공자들의 경험담에 귀 기울이라는 게 인사 담당자들의 귀띔이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