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 발라 꾹꾹 눌러 쓰던 동아연필…
황홀한 색깔, 가슴 설렌 왕자파스…
11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초등학교 중 하나인 종로구 가회동 재동초등학교. 고즈넉한 가을 정취가 묻어나는 가회동 길 초입의 이 학교 근처에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문방구 3곳이 옹기종기 둥지를 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학교 앞을 지키는 문방구는 2평 남짓한 크기의 ‘재동종합문구점’이 유일합니다.
내년이면 60세가 된다는 이 문구점 사장님은 “예전 문방구가 참 좋았는데…”라며 한숨을 짓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1년에 공책 3, 4권도 필요없어요. 숙제고 뭐고 다 컴퓨터로 하니 연필도 잘 안 쓰지 뭐. 애들로 북적이던 문방구는 다 옛날 일이에요.”
어른들에게 어린 시절 아련한 향수로 남아 있는 문구의 추억이 2000년대의 학생들에게는 아마도 키보드나 컴퓨터 모니터쯤으로 대체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생각해 보면 백발이 성성한 60, 70대는 물론 20대만 해도 문구는 어린 시절 추억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볼펜대에 끼운 몽당연필, ‘새마을 운동’ 로고가 큼지막한 노트, 미술시간의 스타 ‘왕자파스’….
쉬는 시간 ‘지우개 따먹기’를 하는 데에는 납작한 네모 모양의 ‘선생님 지우개’, ‘대통령 지우개’가 빠질 수 없었고, 하굣길 들른 문방구에서는 ‘후레시 맨’, ‘닌자 거북이’, ‘피구왕 통키’ 등 다양한 캐릭터 문구들이 발길을 사로잡았죠.
그래서 이번 주 위크엔드는 ‘문구 타임머신’을 타고, 사라져가는 그 때 그 시절로 추억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습니다.
자, 그럼 다 함께 타임머신에 올라타 볼까요.
○ 1940, 50년대: 미제 연필 한 자루가 ‘보물’이던 시절
우리나라에 지금과 같은 현대적 의미의 ‘문구’가 등장한 것은 1945년 광복 이후부터다. 이 시기 가장 먼저 공장에서 생산한 문구는 연필이었는데, 1946년 설립된 대동아연필주식회사(현 동아연필)는 국내 최초의 연필회사였다.
한국문구공업협동조합이 보관하고 있는 이 시기 자료들을 보자. ‘광복 무렵, 대전에서는 일본 미쓰비시 연필이 세운 연필공장이 거의 완성돼가고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광복이 오면서 이들은 공장을 채 가동도 못해본 채 떠나야 했고, 이들 설비를 기반으로 동아연필이 설립돼 연필 생산을 시작했다.’
당시 연필은 흑연에 진흙 혼합물을 첨가하는 원시적 방법으로 제조됐다. 연필심은 강도는 약하면서도 표면은 거칠어 부러지거나 종이를 찢어놓기 일쑤였다.
연필로 진한 글씨를 쓰겠다고 연필심을 빨던 어린이들은 “납독 오른다”며 부모님께 혼쭐이 났다.
공책도 수준은 비슷했다. 이 시기의 국산 공책이란 손으로 줄을 친 종이를 적당히 자르고 풀칠을 하거나 송곳으로 구멍을 내 실로 꿰맨 영세 수공업 제품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공책을 만들 종이가 없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은밀한’ 종이부터, 갱지와 화선지, 신문 파지(破紙)까지 모두 공책 원료로 활용됐다.
필통 같은 철제 문구는 군용 비행장에서 버린 부서진 항공기나 방독마스크의 공기정화통 놋쇠판을 뜯어 펴 만든 제품이 많았다.
“당시 형제공업사라는 회사가 있었어요. 미군이 내다버린 맥주 캔을 펴서 만든 ‘캔 필통’이라는 걸 생산했는데 아주 큰 인기였지. 생산비는 1원50전인데 가격은 10원 가까이 돼서 수익도 아주 짭짤했어요.”(손영목 한국문인협회 이사)
이 회사는 굵은 연필심을 캔 고철로 감싸 만든 ‘캔 연필’이란 것도 만들었다. 캔 연필은 목재가 부족해 대량 생산할 수 없었던 연필을 대신해 한 달에 10만 자루 넘게 팔리는 ‘대박’을 냈다.
이 때의 문구들은 크기도, 모양도, 원료의 질도 제각각으로 꽤나 조악했지만 모든 것이 귀한 시절이었던 만큼 늘 품귀 현상을 빚었다. 문구를 가질 수 있는 사람들 역시 일부 지식인이나 부유층으로 한정됐고 어쩌다 전후 구호품으로 들어온 미제, 일제 연필 한 자루를 얻게 된 아이들은 이를 보물처럼 소중하게 여겼다.
모나미볼펜 똥 닦으며 정성껏 통지표 적으시던…
담임선생님 모습 기억나나요
양철필통에 길쭉한 연필을 넣어다니는 친구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1952년경 등장한 국내 최초의 크레파스 ‘바둑이 파스’를 비롯해 ‘삼성물감’, ‘지구파스’ 등은 그야말로 부잣집 아들, 딸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의 상징이었다.
○ 1960, 70년대: “우리 것도 좋은 것이여”
그러나 1950년대 후반 들어 국내 문구업계의 발전에 속도가 붙으면서 이러한 상황에도 조금씩 변화가 왔다.
우리 기술로 만든 양면인쇄 윤전기가 개발되면서 기계식 공정을 적용한 최초의 국산 공책인 ‘거북표 공책’이 등장했고, 일본에서 신식 기계와 미색 모조지를 수입해 고급 공책 만들기에 공들이는 회사도 늘어갔다.
국내 최초의 공책회사로 알려져 있는 칠성사는 1965년 ‘중질지’라는 종이를 개발해 문구업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이 시기 공책은 초등학생용은 갱지로, 중고교생 및 대학생용은 모조지로 만들었는데 이 두 종이의 중간 품질인 중질지 제품이 학생들에게 큰 반향을 낳았던 것이다.
당시 칠성사의 독주를 보다 못한 경쟁업체들은 당국에 “1년이나 쓰는 교과서도 갱지로 만드는 마당에 금방 금방 바꾸는 공책에 고급 종이를 쓰는 것은 반(反)사회적이며 낭비”라고 탄원하기도 했다.
연필업계에서는 제품 경쟁이 뜨거워지면서 ‘마케팅’도 시작됐다.
동아연필과 함께 당대 연필시장을 주도하던 문화연필은 문구제품 최초로 선전 포스터를 만들고 라디오 방송을 시작해 화제를 낳았다. 당시의 라디오 광고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CM송이 곁들여졌는데 ‘우리들은 국산 애용’이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외국산만 좋다 말자, 마음마저 빼앗길라’라는 가사로 시작된다.
문화연필은 이 노래의 악보를 전국 학교로 보내고 무료 레코드판을 보급해 어린이들 사이에서 애창곡이 됐다.
당시 생산된 문구에서는 새마을 운동을 상징하는 새싹 로고나, ‘사람은 자연보호, 자연은 사람보호’처럼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계몽적 슬로건을 흔히 발견할 수 있었다.
한편 1963년엔 지금까지도 국내 문구업계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광신화학공업사(현 모나미)의 ‘모나미 153볼펜’이 개발됐다.
국산 기술로 생산된 최초의 볼펜은 왕자화학공업사의 ‘왕자볼펜’(이후 ‘럭키볼펜’으로 이름 변경)이었지만, 개당 15원(개발당시 기준)이라는 합리적 가격을 자랑하던 모나미 볼펜에 밀려 곧 사라졌고, 1970년대 중반 모나미는 전국의 볼펜 시장을 석권했다.
사실 지금에 비하면 초창기 모나미 볼펜의 품질은 형편없었다. 평소에는 ‘볼펜 똥’이라 부르던 잉크 찌꺼기가 무더기로 나와 중요한 문서를 작성할 때는 옆에 헌 종이를 놓아두고 ‘똥을 닦아가며’ 글씨를 써야 했다. 그러다가도 날씨가 조금만 추워지면 촛불에 볼펜심을 달궈야 얼어붙은 잉크가 흘러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풍경도 추억이에요. 아직도 학기말이면 연방 볼펜 똥을 닦아가며 정성껏 통지표를 적어주시던 담임선생님 모습이 생생하거든요.(웃음) 통지표마저 컴퓨터 활자로 프린트된 걸 받는 요즘 학생들은 가질 수 없는 추억이겠죠.”(30대 회사원 김주영 씨)
이 시기 모나미는 지금까지도 많은 30, 40대에게 아련한 향수로 기억되는 ‘왕자파스’로도 큰 인기를 얻었다. 동아교재주식회사의 ‘피노키오’, 경인상사주식회사의 ‘티티’ 크레파스 등도 20∼40대라면 누구나 추억의 아이템으로 기억할 법한 당대의 인기 제품들이다.
○ 1980∼현재: 팬시 문구에서 디자인 문구까지
1970년대까지의 문구제품들이 실용성, 경제성 등에 가치를 뒀다면 1980년대부터는 패션화, 고급화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 이른바 ‘팬시문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때부터 국내 문구제품에는 화려한 디자인이 적용됐는데 우리나라 고유의 캐릭터 디자인이 많지 않던 초창기에는 일본 산리오사(社)의 ‘키티’나 미국 디즈니의 ‘미키마우스’ 등 유명 캐릭터를 흉내낸 디자인이 난무했다.(하지만 캐릭터의 얼굴이라든가 귀의 모양이 묘하게 달랐다.)
‘영심이’, ‘까치’ 같은 순수 국산 만화 캐릭터를 비롯해 ‘드래곤 볼’, ‘닌자 거북이’, ‘후레시 맨’, ‘그랑죠’, ‘피구왕 통키’ 등 당시 선풍적인 인기였던 일본 만화 캐릭터를 적용한 제품도 많았다.
학교 앞 문방구에 화려하게 진열돼 있던 이들 제품은 모닝글로리, 바른손 등 전문 팬시문구회사의 문구와 함께 1980, 90년대 학생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이 시기 팬시전문기업의 문구 디자인은 서정적인 일러스트레이션이나 소녀적 감성의 인형사진, 사랑, 우정 등을 주제로 한 짧은 영어문구 등을 채택한 것이 특징이었다.
“돌이켜보면 이때가 국내 문구업계의 전성기였어요. 외환위기를 겪은 이후 컴퓨터마저 일반화되면서 지금은 문구회사들이 많이 어려워졌죠. 그나마 이제 학생들이 동네 문방구에서 물건을 잘 안 사요. 대형서점이나 백화점, 할인마트로들 몰려가니까요.”(한국문구공업협동조합 신건식 전무)
이러한 추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최근 문구업계는 ‘디자인 문구’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있다. ‘o-check’, ‘mmmg’ 등 브랜드 고유의 디자인 정체성을 강조하는 디자인 문구는 비교적 높은 값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에게서 높은 호응을 얻고 있다.
온·오프라인 모두에서 디자인 문구시장이 커지면서 최근에는 ‘손글씨’의 향수를 가진 중장년 소비자들도 디자인 문구 브랜드의 연필, 공책 등을 다시 찾는 추세다.
디자인제품 전문 쇼핑몰 ‘텐바이텐’ 관계자는 “펜 하나라도 자신의 개성을 담고 싶어하는 성인들의 수요가 상당하다”며 “이들의 감각과 감성을 만족시킬 수 있는 디자인 문구시장은 앞으로 계속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글·사진=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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