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스타일/패션]자유롭게 그러나 품위있게

입력 | 2008-10-17 03:02:00


《삼성그룹 계열사 직원들이 옷을 사기 위해 자주 들르는 제일모직 매장에선 요즘 무턱대고 “비즈니스 캐주얼 주세요”라는 주문이 많다고 한다. 삼성전자 등이 이달부터 비즈니스 캐주얼을 근무 복장으로 정하면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정답이 없는 비즈니스 캐주얼을 어렵게 느끼는 직장인들이 다급한 마음에 매장 직원에게 상·하의 등 전체 코디를 부탁하고 있다는 것이다. 별 고민 없이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던 남자들이 비즈니스 캐주얼 시대를 맞아 원했든 원치 않았든 ‘스타일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이제 남자들도 획일화된 정장 차림에서 벗어나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옷으로 드러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지난주 점심시간을 앞두고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 본관을 나서는 삼성 직원들 중 비즈니스 캐주얼을 비교적 잘 소화한 5명을 촬영했다. 미리 취재하겠다고 알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의 패션 코디는 평상시 출근복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남훈 제일모직 ‘란스미어’ 브랜드매니저, 간호섭 홍익대 패션디자인학과 교수, 패션 마케팅회사 오피스 H의 황의건 대표, 우희원 갤러리아백화점 바이어 등 4명의 패션 전문가에게 이들의 사진을 보여주고 평가를 부탁했다.

○ 삼성 직원들의 실제 비즈니스 캐주얼

강정훈 삼성전자 해외홍보그룹 과장은 전문가들로부터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

네이비색 블레이저(재킷의 일종), 밝은 베이지색 면바지, 푸른색 셔츠, 갈색으로 통일한 벨트와 로퍼(끈 없는 구두) 등이 고급스러운 비즈니스 캐주얼 룩의 모범이라는 평가였다.

비즈니스 캐주얼에서는 짙은 색 재킷에 옅은 색 바지를 매치하는 상농하담(上濃下淡), 옅은 색 재킷에 짙은 색 바지를 입는 상담하농(上淡下濃)의 원칙이 있는데, 강 씨는 상농하담을 잘 따른 사례다.

남훈 브랜드매니저는 “한국 남자들은 대부분 회색 바지에 익숙한데 강 씨는 흰색에 가까운 면바지를 입어 품위를 지키는 동시에 개성적인 차별화에 성공했다”며 “다만 바지가 다소 넓고 긴 것이 아쉽다”고 평가했다.

김창준 삼성전자 애니콜영업팀 과장은 검은색 셔츠, 슬림한 실루엣의 ‘띠오리 맨’ 회색 재킷, 베이지색 코듀로이 바지, 줄무늬가 있는 로퍼 등을 매치했다. 간 교수는 “전체적 색상 코디가 침착하면서도 세련됐고, 특히 짙은 색 셔츠를 매치한 점이 훌륭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하의 색상 매치를 지적하는 의견들도 있었다. 남 브랜드매니저는 “회색 재킷과 검은색 셔츠는 어울리지만 베이지색 바지는 다소 어색하다”고 평했다. 우희원 바이어도 “밝은 회색의 치노 팬츠(면바지)가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군호 삼성SDS 전자해외개선파트 사원은 옅은 베이지색 면 재킷, 흰색 셔츠, 네이비색 면바지, 황토색 팀버랜드 로퍼로 자연스럽고도 깔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배 씨는 “해외출장 때 외국인들의 비즈니스 캐주얼을 눈여겨본 게 도움이 된 것 같다”며 “비즈니스 캐주얼은 상의와 하의를 조금만 잘못 매치해도 지저분한 느낌을 줄 수 있어 신경이 많이 쓰인다”고 말했다.

이 밖에 권오형 삼성전자 IR팀 과장은 짙은 회색 재킷과 길지 않은 바지 길이, 김원희 삼성전자 해외홍보그룹 차장은 깃이 높은 멀티 색상의 줄무늬 셔츠가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정장 차림에 넥타이만 풀거나, 재킷 없이 카디건만 걸친 삼성맨들도 많았다. 전문가들은 이런 차림은 올바른 비즈니스 캐주얼이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2000년대 초반부터 비즈니스 캐주얼을 시행하고 있는 LG그룹도 정장에서 넥타이만 생략한 ‘심심한 아저씨 패션’이 주류를 이룬다. 그나마 남용 LG전자 부회장이 재킷 안에 다양한 색상의 카디건을 받쳐 입어 비즈니스 캐주얼을 잘 소화한다는 전언이다.

○ 비즈니스 캐주얼 시대 남자들의 자세

비즈니스 캐주얼은 유가(油價)가 폭등했던 1970년대 미국에서 비롯됐다. 김정희 삼성패션연구소 팀장은 “정장보다 편안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일반 캐주얼보다는 격식을 갖춘 복장”을 비즈니스 캐주얼로 정의한다. 재킷을 중심으로 셔츠, 니트, 바지, 구두 등의 색상과 소재를 품위 있게 매치하는 ‘패션 코디네이션의 절정’이다.

‘꼭 갖춰야 할 비즈니스 캐주얼 아이템’을 전문가들에게 물었다.

남성 패션잡지 ‘GQ’의 강지영 씨는 “정통 정장차림보다 색상과 소재에서 과감해질 것을 권한다”며 네이비색 블레이저, 와인색 줄무늬 셔츠, 회색 플란넬(얇은 모직) 소재 바지 등을 추천했다. 간 교수는 질 좋은 캐시미어 니트와 갈색 로퍼를 권했다.

황의건 대표는 “한국 남자들은 바지를 지나치게 크게 입는 경향이 있는데, 자신의 사이즈를 정확히 알고 그에 딱 맞는 옷을 구비해야 한다”고 했다. 또 “색상은 무턱대고 과감한 것도 좋지 않지만, 반대로 무채색 옷만 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우희원 바이어는 “영화 ‘노팅힐’에 나오는 배우 휴 그랜트의 패션을 참고하라”고 말했다.

그동안 멋 내는 데는 인색하고 어색해하면서도 술 마시는 돈은 아끼지 않았던 한국 남자들. 옷 잘 입는 남자가 일도 잘하고 인정받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지 않는가.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