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슈퍼 진열대 텅텅… 중형銀 예금인출 제한 조치
‘당분간 출입금지.’
16일 오전 러시아 모스크바 남부 볼기나 거리의 슈퍼마켓 ‘사모흐발’ 입구에는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던 직원들은 “진열대가 거의 비었다. 손님이 오더라도 팔 물건이 없다”고 말했다.
한 직원은 “모스크바 시내와 인근에 있는 60개 체인점이 자금난으로 물건 주문을 중단한 상태”라고 귀띔했다. 인근 주민들은 “10년 전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 당시 숱하게 나타났던 텅 빈 가게 진열대를 또 본다”며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러 관영언론 금융위기 쉬쉬
이날 인테르팍스통신은 “러시아 대표주가지수 RTS가 2005년 이후 최저 수준인 740 선으로 떨어진 뒤 거래가 중지돼 금융시장이 패닉에 가까운 상태에 빠졌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주가를 끌어내린 결정적 요인은 국제유가 하락으로 꼽혔다. 이날 러시아 우랄산 원유는 올해 6월의 절반 수준인 배럴당 67.2달러로 떨어졌다. 석유 값이 70달러 미만으로 내려가면 정부 예산도 흑자에서 적자로 돌아선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였다.
이날까지 러시아 관영 언론들은 러시아에 밀어닥친 금융위기를 보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민들은 금융위기로 인한 후폭풍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러시아 중형 은행 ‘글로벡스방크’는 15일 일부 지점에서 고객들이 예금을 대거 인출하자 저축예금을 만기 이전에 찾아가는 것을 금지했다.
금융위기 후폭풍은 러시아보다 사정이 좋지 않은 우크라이나와 발트 3국에서 더욱 거세다.
국제통화기금에 구조금융을 요청한 우크라이나는 달러화 기근 사태를 맞고 있다.
최근 정부에 인수된 나드라은행은 대규모 달러 인출을 막기 위해 현금자동입출금기에서 한 번에 200달러까지만 인출할 수 있도록 한도를 설정해 놓았다. 이 나라 통화인 흐리브니아의 가치는 지난주 달러화 대비 20% 떨어졌다.
키예프에 살고 있는 한인들은 이날 “은행마다 흐리브니아 가치가 더 떨어지기 전에 달러화로 바꿔 놓거나 민간은행에서 돈을 빼 국영은행에 입금하는 사람으로 가득하다”고 전했다.
해외 차입금 의존도가 높았던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의 저가 항공사와 공연기획사, 여행사가 줄줄이 문을 닫고 있다고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라트비아 금융전문가인 카스파르스 카울링슈 씨는 “은행에서 돈을 빌린 소형 업체들은 돈줄이 사실상 막혀 버렸다”고 말했다.
룰라 “우린 위기의 희생자”
한편 금융위기가 세계 각지로 확대되자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우리는 부유한 나라에서 발생한 위기의 희생자”라며 “일부 투기꾼이 세계를 거대한 카지노장으로 만들어 놓고 우리 보고 정부를 어떻게 운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