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작가 김주영의 그림읽기]“유행 아닌 옷은 안입겠다”

입력 | 2008-10-18 02:56:00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천부적인 패션 감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허술한 옷을 몸에 걸치고 다녀도 뭇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성년이 되면서 그녀의 가슴속에는 자연스럽게 유행의 첨단을 걷는다는 자부심이 자리 잡게 되었고, 사교계에선 없어서는 안 될 유명 인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회적 지위와 자부심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창의력을 동원해야 했습니다. 그녀는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최고의 명품만을 사들였습니다. 유행에 뒤졌다 싶으면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의상이라 하더라도 가차 없이 창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그녀가 거리에 나타났다 하면 사람이 구름같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녀에겐 북극곰이나 아프리카 표범과 치타 그리고 얼룩말과 사슴 가죽 따위를 무두질해서 지은 외투가 수백 벌이나 되었습니다. 아무리 다급한 일이 닥쳐도 호들갑을 떨며 빨리 걷지 않았고, 웃을 일이 있어도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고한 성품과 기품을 지닌 여성으로 추앙 받았습니다. 그녀가 무거운 외투를 입었기 때문에 빨리 걷지 못하며, 행여나 두꺼운 화장이 지워질까 맘대로 웃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은 몰랐습니다.

소재의 빈곤을 느낀 그녀는 무늬가 현란한 열대어를 잡아 껍질을 가공하여 옷과 모자 신발을 지어 입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열대어를 잡는 일에도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녀는 남다른 상상력을 발휘하여 곤충의 껍질을 모아 가공하여 옷과 신발을 만들어 입고 신기 시작했습니다.

기필코 유행의 첨단을 걸어야 한다는 그녀의 욕망에 희생된 곤충의 종류만도 수백 종에 이르렀습니다. 호랑나비, 고추잠자리, 장수하늘소, 잎벌레, 풍뎅이, 사슴벌레, 딱정벌레, 노린재, 무당벌레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그녀의 의상 재료로 희생된 벌레는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무당벌레를 끝으로 이 세상에는 더는 의상 재료로 쓰일 것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겐 한 가지 불문율이 있었습니다. 한 번 몸에 걸쳤던 의상은 두 번 다시 입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 옷을 모두 벗은 알몸뚱이로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길거리에는 그날따라 인기척이라곤 느낄 수 없었습니다. 두 눈을 씻고 보아도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없었지요.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로 숨어버렸을까요. 그것은 어느 누구도 허리까지 꼬부라진 벌거숭이 여인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주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