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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정성희]白紙답안

입력 | 2008-10-20 02:56:00


조선시대에도 과거시험을 치르는 유생들이 갖가지 부정행위를 했다고 전해진다. 요즘 방식으로 말하자면 커닝페이퍼를 말아 콧속이나 붓대 끝에 숨기기도 하고 옆 사람과 은밀히 상의하며 답안을 작성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답안지 바꿔치기나 남의 답안 베끼기도 흔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1737∼1805) 같은 사람은 답안지를 백지(白紙)로 내거나 답안지에 글씨 대신 엉뚱한 그림을 그려놓고 나왔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노론 명문가의 자제인 그는 집안의 기대 때문에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긴 했지만 과거에 급제할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소신에 목숨을 건 조선의 아웃사이더’의 저자 노대환 씨에 따르면 절친한 친구 이희천이 명기집략이라는 ‘불온서적’을 소지했다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을 본 이후 조정 진출의 꿈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의 백지답안은 기성 제도에 대한 항의(抗議)와 항명(抗命)의 뜻도 담고 있었을 것이다.

▷중학교 3년생과 고교 1년생을 대상으로 한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일제고사)가 14일 있었다. 대체로 조용히 끝났지만 서울 서초구 세화여중 일부 학생이 백지답안을 내거나 모든 문제에 같은 답을 적어내 물의를 빚고 있다. ‘사교육 1번지’라는 서울의 강남학군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예사롭지 않다. 아무래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일제고사 거부 운동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강남은 전교조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관할 교육청은 전교조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시험 거부를 부추기는 발언을 했는지 조사 중이다. 전교조는 “일제고사가 아이들을 경쟁과 성적의 노예로 만들고 학교를 서열화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제고사가 아니라도 아이들은 이미 수많은 경쟁에 휩싸여 있다. 일제고사를 안 본다고 해서 경쟁이 완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교사들이 시험 거부를 부추겼다면 무슨 아름다운 말을 늘어놓아도 결국 학교를 ‘평가하지도, 평가받지도 않는 교사들의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랬다는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묻고 싶다. 당신이 학부모라면 그런 교사들에게 자식을 맡기겠느냐고.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