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꽃을/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
1945년 광복 직후 유행했던 ‘귀국선’이라는 대중가요의 한 구절이다.
광복과 함께 일본 만주 중국 미국 동남아 등지에서 귀국하는 동포들이 늘어났다. 군대 공장 광산 등에 끌려갔거나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망명했던 동포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동포들이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밟기 위해 귀국선을 탄 것이다. 귀국선을 맞이하는 부산항 등은 온통 눈물바다였다.
광복 당시 일본엔 약 200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 일본은 한국인의 귀국에 협조하지 않았다. 한국으로 갖고 들어갈 수 있는 재산에 제한을 두었다.
그래서 약 140만 명만 귀국하고 약 60만 명의 한국인이 일본에 남게 되었다. 이들은 일본에서 심한 차별을 받았다. 광복은 되었지만 재일 한국인은 여전히 불안정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이 문제가 한일 양국의 중요 현안으로 부각된 것은 1951년 한일회담이 시작되면서.
한일회담은 미국의 주선으로 시작됐다. 6·25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은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선 한국의 배후기지가 되는 일본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중재로 1951년 10월 20일 일본 도쿄에서 제1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이 열렸다.
이 예비회담의 주요 쟁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재일 한국인이었다. 우리 정부는 재일교포의 영주권 문제, 강제퇴거 문제, 생활보호 문제 등에 있어 차별 금지와 정당한 대우를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요구를 거부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 및 정신적 물질적 피해보상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었다. 오히려 일본인들이 한국에 남겨놓고 온 재산 반환 문제를 거론했다.
예비회담은 별다른 성과 없이 12월 4일 끝났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1년 2월 15일 이승만 정부와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내각 사이에 제1차 한일회담 본회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4월 21일 중단됐다.
이승만 정부, 장면 정부, 박정희 정부를 거치며 1965년까지 7차례에 걸쳐 진행된 한일회담은 이처럼 처음부터 난항을 겪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