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꿈/오정희 지음/228쪽·1만 원·랜덤하우스코리아
사람들의 일상은 평범하고 무료하면서도 때로 극적이다. 가난하고 혹독했던 젊은 날이 지나고 이제 겨우 살 만해졌다 싶은 날, 암이란 병이 찾아온다. 집을 나가버린 양아들을 수십 년이 지나 우연히 마주치기도 한다. 위층의 소음에 항의하러 갔다가 휠체어를 타고 있는 집주인을 만나게 되는 작은 반전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이 있더라, 이런 일도 다 겪었다’며 가족과 이웃끼리, 오랜 친구들끼리 두런두런 주고받을 법한 삶의 소소한 사건들을 작가는 25편의 짤막한 소설로 엮어냈다.
이 소설집에 실린 대부분의 이야기는 중년 남녀가 주인공이다. ‘인생의, 정당하게 할당된 몫인 슬픔과 불행’을 꿋꿋이 감내하며 삶의 한가운데를 통과 중인 이들이다.
‘맞불 지르기’는 술꾼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응징기다. 툭하면 고주망태가 돼 들어오면서도 ‘당신이 남자를 아느냐, 남자들이 살아야 하는 세계의 치열함과 외로움을 아느냐’고 주야장천 허장성세인 주당 남편. 더 두고 볼 수 없는 아내는 해장국거리를 사는 대신 잠이 덜 깬 남편 앞에서 소주를 병째 들이마시는 것으로 맞불을 놓는다.
노총각이 뜻밖의 상황에서 첫사랑을 마주치게 된 일화를 다룬 ‘몹쓸 사랑의 노래’는 실소와 서글픔을 함께 안겨준다. ‘생활이란 미명하에 적당히 뻔뻔하고 탐욕스럽고 거칠고 수다스러워지는 여자들’이 싫어 결혼을 고사하고 있는 그에게 첫사랑 정애는 유일하게 미래 모습을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던 여자. 그녀를 연상시켰던 소녀를 따라가다 중년의 뚱뚱한 여자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게 되는데, 여자를 보며 그는 부르짖음을 삼킨다. ‘아, 정애.’
때로 아내는 이유 없이, 하염없이 울기도 한다. 발레리나가 되고 싶어 했던 아내는 세 명의 아이를 낳고 키우며 적당히 늙고 적당히 진부해졌다. ‘새로이 시작하기에도, 포기하기에도 어려운’ 기로에 선 그녀는 아침이 되면 부어오른 눈으로 다시 아침상을 차릴 것이다.(‘아내의 30대’)
일상의 애환에서 묻어나는 소박한 웃음, 혹은 묵직하지만 제 몫으로 인내해야 할 서글픔과 비감. 작가가 빚어낸 이 시대 필부필부의 삶을 응시하는 것은 삶의 또 다른 위안이 된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