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8일까지 가인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작가 최병소 씨는 ‘선 긋기’라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독특한 감성이 녹아 있는 새로운 미적 산물을 만들어낸다. 신문지에 볼펜으로 선을 빼곡히 그은 뒤 다시 그 위를 연필로 칠하는 노동집약적 작업을 통해 종이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얇은 금속성 물질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사진 제공 가인갤러리
‘채집된 산수Ⅱ’전에서 선보인 작가 박병춘 씨의 ‘정선 가는 길’. 그는 일일이 작은 점과 구불구불한 짧은 선을 하나씩 그려 넣는 수작업 과정을 통해 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산을 독특하게 표현한다. 사진 제공 동산방
우직한 노동과 끈기의 결실이다. 검정 볼펜과 연필로 새까맣게 칠해 여기저기 찢기고 너덜너덜해진 신문지. 종이가 아니라 얇디얇은 금속판처럼 보인다. 작품 하나 완성하는 데 모나미153 볼펜심이 20개 정도 들어간다. 잠자는 시간만 빼고 신문지 앞뒤에 볼펜으로 선을 긋고, 그 위에 연필로 선을 긋는다. 인쇄된 내용이 사라져야만 태어나는 작품들. 11월 8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인갤러리(02-394-3631)에서 열리는 작가 최병소전에서 만날 수 있다.
행글라이더와 낡은 소파가 있는 산수화. 그 안을 들여다보니 작은 점과 짧은 선이 수없이 겹쳐 있다. 숲을 이룬 점도 그냥 그린 게 아니다. 강원 영월과 충북 제천 등 작가가 직접 찾아가 만난 나무와 덤불의 기억을 담고 있다. 그가 하나하나 정성스레 그려낸 점들은 전통 산수를 예술적 생명력으로 현대에 되살려낸다. 29일∼11월 11일 서울 동산방 화랑(02-733-5877)에서 열리는 박병춘(42) 씨의 ‘채집된 산수Ⅱ’에 나온 작품들이다.
극과 극처럼 멀어 보이는 두 작업은 손맛이 살아 숨쉰다는 점에서 닮았다. 첨단과 거리가 먼 아날로그형 작품에선 머리로만 완성한 작품과는 다른 정서적 울림이 느껴진다. 디지털 세계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인간의 온기와 소박한 위로를 건네주기 때문이다.
#선을 긋는다-나를 비우는 수행의 길
대구에 사는 작가 최병소(65) 씨의 작업도구는 간단하다. 신문지, 볼펜, 연필. 작품의 독특함과 미술사적 비중에 비해 대중의 관심권에서 비켜 있던 그에겐 작업실이 따로 없다. 마루든 방이든 어디서든 작업을 시작하면 하루 종일 선긋기에 몰입한다. 음악도 듣지 않는다. 종이에 볼펜 스치는 소리, 종이 찢어지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 고행도 이런 고행이 없다.
그는 “내 작업은 고색창연하고 구식이다. 그런데 내 체질하고 맞는다”며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작업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작가에겐 자신을 비우는 작업이지만 보는 사람에겐 여러 생각을 이끌어낸다. 이미지도, 색채도, 붓 자국도 없는 작품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저릿저릿한 느낌이 온다는 반응도 있고, 해외에선 실존적 아픔과 고통이 진하게 느껴진다는 얘기도 들었다. 엄청난 공력과 지루한 노동이 쌓여 마침내 완성된 작품은 허탈할 정도로 화려함과 거리가 멀다. 내세울 훈장도 없이 묵묵히 삶을 감내하는 사람의 모습이 그 안에 묘하게 겹쳐진다.
#점을 그린다-기운생동의 즐거운 산수
전통 산수를 ‘라면 풍경’ ‘칠판 산수’ 등으로 다양하게 실험해 온 화가 박병춘 씨의 작업 역시 수공업적 노동에 기대고 있다. 수색역 부근 작업실에 찾아갔을 때 그는 “목이 아파 병원에 다녀왔다”면서도 작품을 꺼내 보이며 열정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풍경을 따라 여행을 하면서 나는 인생을 배우고 그 위에서 내 그림은 산수가 되어간다. 현장에서 그린 사생첩만 90권이 넘는다. 이를 바탕으로 하루 열 시간씩 점을 그린다.”
점을 찍지 않고 그린다는 점을 강조하는 작가. ‘라면준’이라 불리는 독특한 기법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작품에 바짝 다가서야 한다. 시간을 두고 꼬불꼬불한 붓질을 따라가면 ‘회화적 힘’과 더불어 특별한 덤을 얻는다. 그가 발품을 팔았던 산과 길, 한구석에 숨겨 놓은 ‘남녀상열지사’ 장면과 마주치는 재미다.
공고 졸업 후 공장에서 일하던 그는 화가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안고 스물세 살에 홍익대 미대에 들어갔다. 그 뒤 지금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다는 화가. 그의 땀방울과 손맛이 배어 있는 산수는 이제 보는 사람들에게도 즐거움을 퍼뜨린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