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셔라! 이 생의 늦가을, 적멸로 가는 길
《산골 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 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보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백석 (1912∼1995)·‘백화 白樺’ 전문》
자작나무가 알몸을 드러내고 있다. 눈부시게 하얀 몸. 바람이 불면 우수수 몸을 떤다. 황갈색 나뭇잎이 소나기가 되어 내린다. 이제 강원도 오대산 자락 구룡령 골짜기 자작나무들은 잎이 몇 개 남지 않았다. 오대산 정상 비로봉 언저리 나무들은 아예 ‘올 누드’다. “지∼직∼자∼작∼” 소리내며 메밀국수 삶는 장작나무.
자작나무는 춥고 높은 데서 산다.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와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의 주목나무가 동무다. 바람에 몸이 마르면 바가지우물(박우물)에서 목을 축이고, 죽으면 팔만대장경 부처말씀 새기라고 기꺼이 몸을 보시한다.
강원도 산골짜기는 이미 초겨울이다. 나무들은 저마다 몸을 드러내놓고 있다. 새 둥지 같은 겨우살이만 뻔뻔하게 마른 나무들 우듬지에서 진을 빨고 있다. 기름이 자르르 푸릇푸릇한 겨우살이. 뼈만 남은 참나무 팽나무 물오리나무 밤나무 어깨에서 빌붙어 사는 기생나무. 여름엔 무성한 이파리들 등 뒤에 숨어 있다가, 겨울에야 피둥피둥 살찐 몸 배시시 드러내는, 사철 푸른 베짱이 나무. 그 뿌리는 다른 나무들의 혈관에 닿아 있고, 그 가지는 얄밉게도 햇볕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뻗어 있다.
○ 영동의 해산물-영서의 곡식 맞바꾸러 가던 길
구룡령 옛길은 조붓한 오솔길이다. 맛있다. 걷다 보면 가랑잎 구르는 소리가 난다. “쏴아∼ 쏴아∼” 바람 달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우르르 바람 발굽소리가 어지럽다. 발밑엔 마른 나뭇잎들이 수북하다. 발이 푹푹 빠지지만 푹신하다. 마른 바늘솔잎들이 화살표처럼 가지런히 누워 있다. 걷기보단 그냥 뒹굴고 싶다. 와락 콧속으로 나뭇잎 냄새가 밀려온다. 내가 살아 있다는 충만감이 가슴 가득 뻐근하다.
문득 마른 낙엽들이 들썩일 때마다 간고등어 냄새가 난다. 마른 명태나 오징어 냄새도 솔솔 풍긴다. 옛날 양양 아버지들은 각종 해산물을 등에 지고 이 고갯길을 넘었다. 등짐은 홍천 시장에서 콩 팥 수수 좁쌀 깨 녹두 등 곡식으로 바꿨다. 그 대신 홍천 아버지들은 밭곡식을 등에 지고 이 고개를 넘었다. 양양 어시장에서 소금 등 각종 해산물로 바꿨다.
영동 영서지방 아버지들의 눈물이 어린 길. 아이들이 장에 간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던 길. 어머니들은 지아비가 험한 곳을 디딜세라 ‘달님이시여 제발 높이 돋아서, 멀리멀리 비추시라’고 애타게 빌던 고갯길. 그래서 양양 홍천 사람들은 이 고개를 ‘바꾸미 길’이라고 부른다.
구룡령 옛길은 문화재청으로부터 명승 29호로 지정된 ‘문화재 길’(옛길 정상∼갈천 산촌체험학교 2.76km)이기도 하다. 명승 길은 죽령 옛길, 문경새재, 문경의 토끼비리(관갑천 잔도)와 함께 우리나라에 4개뿐이다. 하지만 홍천내면 명개리∼옛길 정상까지 3.7km 부분은 명승길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구룡령 옛길의 약 42%만 명승길인 셈이다.
명개리에서 출발하려면 명지1교 오른쪽으로 계곡을 따라 오르면 된다. 양양 쪽에서 오르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보통 명개리 쪽 코스를 생략하고 휴게소가 있었던(현재 폐점) 국도 56호선 고갯마루에서 옛길 정상 쪽으로(1.6km) 가는 사람이 많다. 양양 쪽에서 오른다면 옛길 정상에서 명개리 쪽으로 가든지, 아니면 국도 56호선 고갯마루 쪽으로 빠지든지 형편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스페인 산티아고 길 800km와 우리 땅 국토순례를 마친 ‘걷기고수 할머니’ 황안나(69) 씨는 “60대를 보내는 마지막 가을에 구룡령 옛길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발이 푹푹 빠지는 마른 나뭇잎을 밟으며 어쩔 수 없이 ‘나도 머잖아 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나뭇잎이 썩으면 새잎이 돋을 텐데, 과연 나는 저 낙엽만큼이라도 밑거름 노릇을 제대로 했을까? 이렇게 좋은 길을 걷다 보니 문득 아들 며느리 손자 생각이 나고, 집에 홀로 두고 온 남편 생각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걷기경력 10년의 회사원 김현실(44) 씨는 “구룡령 옛길은 산속에 숨어 있는 길인데도 전혀 답답한 느낌이 없었다. 마치 여러 겹 접힌 산길을 따라 걷는 기분이었다. 두고두고 향기로웠고 내내 여운이 남았다. 옛날 사람들이 삶을 위해 이 길을 오갔다는 사실도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같은 연두색이지만 봄과는 또 다른 맛의 연두색 나뭇잎들도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모든 것은 어쩔 수 없이 사라져야 한다는…”이라며 말을 아꼈다.
산행경력 20여 년의 회사원 김선희(45) 씨는 “산책하듯이 즐겁게 걸었다. 시간이 없어 명개리까지 걷지 못하고, 구룡령 정상에서 끝낸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 칼바람을 온몸에 맞으면서 걸으니, 뭔가 날선 기운이 가득 차 기분이 좋았다. 하얀 자작나무 끝이 푸른 하늘로 솟구쳐 있는 모습은 정말 압권이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앞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걷는다는 것 자체가 인생 공부다. 내 뒷모습은 과연 어떨까? 늘 궁금하고 불안하다”고 말했다.
걷기경력 6년의 오병갑(42) 씨는 “구간구간마다 아기자기한 데다 전설까지 서려 있어서 좋았다. 하얀 횟돌이 많은 곳을 ‘횟돌반쟁이’라고 한다거나, 우뚝우뚝 금강소나무가 많은 곳을 ‘솔반쟁이’라고 부르는 등 이름만 들어도 빙긋이 웃음이 나왔다. ‘묘반쟁이’에는 진짜 무덤도 하나 있었다. 소박한 서민들의 발걸음이 닿던 곳이라 더욱 애착이 갔다”고 말했다.
○ 오대산 월정사까지 26km 흙길 이어 걸을 수도
구룡령 옛길은 명개리에서 오대산으로 이어진다. 명개리∼두로령∼북대 미륵암∼상원사∼월정사까지 26km의 신작로 흙길(지방도 446호선)을 걸을 수 있다. 고갯마루(두로령)나 북대미륵암에서 오대산 능선을 탈 수도 있다. 하지만 거꾸로 오르는 셈이어서 힘들다. 월정사 쪽에서 명개리 쪽으로 걷는 게 한결 수월하다. 흙길을 걷는 게 지루하면 상원사에서 적멸보궁∼비로봉∼상왕봉∼북대 미륵암으로 능선을 한바퀴 돈 뒤, 다시 신작로 흙길을 따라 명개리 쪽으로 나와도 된다.
오대산은 비로봉(1563.4m)-동대산(1434m)-두로봉(1422m)-상왕봉(1491m)-호령봉(1561m)의 다섯 봉우리가 만드는 거대한 연꽃 봉오리다. 가을에 단풍이 들면 붉은 연꽃이 핀다. 겨울에 흰눈이 내리면 백련 꽃이 된다. 연꽃은 풍만하다. 오대산은 흙산이다. 둥글면서도 후덕하다. 요즘 오대산은 뼈를 거의 드러내고 하얀 눈을 기다리고 있다. 겨울엔 산기운이 쩌렁쩌렁하다. 오대산 오만보살들이 얼음산에 올라 일제히 염불을 한다. 하얀 자작나무들도 밤새 산꼭대기에서 불경을 소리 내어 외운다. “자∼작∼자∼작∼.”
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 mars@donga.com
언뜻보면 소박 뜯어보면 화려… 진전사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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