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강사 한일(41)_단국대 전자공학과 중퇴_UCLA 아시아 스터디_위스콘신 유니버시티 커뮤니케이션학_콜럼비아 대학 티처스 칼리지 석사과정 중_현 EBS lang영어강사.
한일 선생의 기초 영문법 강의는 EBS-lang의 대표상품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EBS자료화면
15년 전. 무작정 편도 비행기표 한 장을 끊어 미국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 내린 한국청년은 택시를 타고 이렇게 말했다.
"유니버시티, 고! (University, Go!)"
간단한 영어 문장 하나 만들 줄 몰랐던 그 청년은 15년 후 한국에서 '기초 영문법' 돌풍을 일으킨 영어 강사가 됐다. EBS 영어 강사 한일(41)씨가 그 주인공이다.
한 씨는 EBS 온라인 서비스인 'EBS 랑'의 최고 인기 강사다. '한일관'이 따로 마련돼 있을 정도이고 '베스트 다운로드 강의' 목록에선 MP3와 PMP 모두 그의 '기초영문법' 강의가 부동의 1위다.
EBS 인터넷에서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은 10만 명을 넘었고, 2년 전부터 그가 펴낸 '한국에서 유일한 기초 영문법' 시리즈는 20만부가 넘게 팔려 나갔다.
특이한 것은 'EBS 랑'에 오른 6900여건의 수강후기 중엔 "영어를 포기했는데 자신감을 주어 감사하다"는 내용이 태반이라는 점이다.
영어 공부를 하다 중도에 포기해 본 직장인, 왜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는 학생, 가정주부 등 영어 때문에 상처를 받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그를 찾는다. 인터넷 게시판에 '영어에 흥미를 못 느끼겠다'는 푸념이 올라오면 '한일 강의를 들어보라'는 충고가 따라 붙을 정도다.
효율적인 영어 학습을 위한 방법론이 난무하는 가운데 한 씨는 우직하게 기초영문법과 기초영작문을 고집하는 '영어기술자'를 자임하고 있다.
"영어에 철저하게 패배해 본 제 경험을 살린 거죠. 원래 저는 대학을 중퇴한 실패자, 군대를 다녀온 뒤엔 노숙자들 틈새에서 방황했을 정도로 뭘 해야 할지 모르던 답답한 청년이었거든요."
고교 모의고사에서 60명 중 58등을 했고 생활기록부에 '전혀 장래가 없어 보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던 그가 어떻게 '영어 꼴찌'들의 우상이 될 수 있었을까. 최근 만나 들어본 그의 삶은 '결단의 실천'이 가져다 준 반전의 연속이었다.
● 노력보다 열정을 선택한 결단
"저요? 아주 평범한 대학생이었어요. 선배들 따라 '양키 고 홈!'을 외쳤고, 순탄하게 군대에 다녀와 사회진출을 고민하던…."
1992년 봄, 그가 전자공학과 4학년에 올라갈 즈음이었다. 취업이 어렵지 않던 때였고 대우가 나쁘지 않은 회사를 쉽게 고를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고민은 '적성'이었다.
"수업시간에 저는 완전히 꿔다놓은 보릿자루였어요. 내가 뭘 배우는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이 정말 끔찍하더라고요. 애당초 문과 체질인데 별 생각 없이 전공을 선택한 탓이죠."
노력보다 적성과 열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순간 자퇴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관심도, 열정도 없는 전공에 어정쩡하게 인생을 걸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3학년까지 마쳐놓은 마당에 부모님께 그런 이야기를 꺼내기도 쉽지 않더군요. 확실한 건 여기서 인생을 바꾸지 않는다면 평생 불행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는 자퇴를 위해 학과 사무실을 찾았다. 학과에서는 "3학년을 마치고 자퇴한 전례가 없다"면서 휴학을 권했다. 심지어 제대로 된 자퇴 신청 양식조차 없었다. 통사정 끝에 그가 자퇴서류를 작성하자 담당자는 영수증을 건네며 "혹시 모르니 이 등록금 영수증을 가져오면 언제든지 복학을 시켜주겠다"고 위로했다.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그는 영수증을 찢어 버렸다. '이건 내 길이 아니다'는 생각에.
● 어디서 길을 찾을까
그리곤 본격적인 방황이 시작됐다.
도서관에도 다녀보고 노숙자들 틈에 끼어 배고픔을 해결하기도 했다. 대학을 그만 둔 20대 중반의 젊은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예상보다 많지 않았다. 밥값을 하고 살려면 기술을 배워야 할 것만 같았다.
"어떤 기술을 배워야 할지도 막막했어요. 그냥 '운동권적 감수성'으로 중장비 기술을 배워 노동자로 살아볼까도 고민했고요."
그러다 문득 군대에 있을 때 흘낏 들여다본 미군부대가 떠올랐다.
"전방부대에서 바라본 미군(미국)은 대학시절 막연하게 상상하던 세계와 다르더군요. 그들의 철저한 복지제도, 치밀한 시스템을 보면서 저런 건 꼭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왕 기술을 배울 거면 미국에서 배워 보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1993년 당시 미국은 LA 흑인폭동의 여파로 한인들의 왕래가 뜸하던 시기였다. 유학이나 이민을 가는 경우야 적지 않았지만 그처럼 대책 없이 기술을 배우러 간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의 대학 중퇴를 부끄러워하던 부모가 "하루빨리 미국에라도 가라"고 종용을 했기에 가능한 '도피'였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고졸 학력의 24살 젊은이는 그렇게 미국 땅에 도착해 갓 이민 온 사람과 불법 체류자들에게 최소한도의 서바이벌 영어를 가르치는 공짜 수업을 들으며 영어와의 '전투'를 시작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기술을 미국에서 찾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입수 가능한 모든 대학의 학과 소개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장의학과까지 있더군요.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와! 미국에는 이런 학과도 있구나, 한국과는 다른 관점에서 사람의 죽음을 접근할 수 있구나, 하고요."
그러나 '독창적 기술'을 찾으려던 그의 시도는 번번이 부모의 반대에 부딪혔다. 급기야 그의 부모는 어렵사리 보내주던 학비마저 끊어버렸다. 그러는 동안 그의 영어실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원리를 전혀 몰랐던 탓에" 닥치는 대로 7000개의 영어 문장을 외워버린 결과였다.
"제 영어학습 속도가 빨랐던 이유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갔기 때문인 것 같아요.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모르니 그냥 무턱대고 외우고 또 외운 거지요. 반면 어느 정도 영어를 알고 온 사람들은 6개월~1년이 지나니 어느 선에서 만족하고 성장이 멈추더군요."
● 또 한번의 자퇴결심, 그리고 도전
방황을 거듭하던 그는 '아시아학'을 선택해 UCLA에 진학했다. 하지만 역시 그의 길은 아니었다.
"전자공학과 마찬가지로 공부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어요. 아예 의학을 공부해 볼까 하고 또 한번의 자퇴를 결심했지요. 그런데…."
두 번째 자퇴는 조금 더 쉬울 줄 알았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그에게 새로운 제안을 건넸다. 자퇴하기 전 학내 카운슬러를 만나보라는 거였다. 제안을 듣는 둥 마는 둥 집에 틀어박혀 있던 그에게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학교 카운슬러였다. "자퇴하기 전에 5분만 상담을 받아보라"고 되레 카운슬러가 요청을 해왔다.
그리고 그 전화는 그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다. 그가 살아온 이력을 차근차근 듣던 카운슬러는 황당하게도 그에게 '영어교사' 전공을 제안했다. "당신처럼 독특한 영어 학습 경험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원어민보다 영어교습을 더 잘 할 수 있다"는 설명과 함께.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반벙어리에서 시작해 학교 공부도 간신히 따라가던 나더러 영어선생이라니요. 어이가 없어 한참을 웃었어요."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어찌됐건 20대 중반까지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던 그가 학습을 통해 미국 대학공부가 가능한 수준까지 온 것 아닌가. 카운슬러는 한술 더 떠 국제영어교사(TESOL)자격 과정을 이수할 수 있는 대학까지 추천했다.
그렇게 그는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 위스콘신 대학에서 영어교육을 전공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TESOL 과정을 마쳤다. 교생실습을 할 때는 미국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소수 이민자들을 위한 영어 교습 경험을 쌓았다. 대학을 마친 뒤에는 다시 LA로 돌아와 소수 이민자를 위한 영어 교육에 뛰어 들었다.
● 영어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는 게 첫걸음
"노숙자도 가르치고 영어 한마디 못하는 한인 목사님들도 집중적으로 가르쳤어요. 돈 받고 영어를 가르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요. 하지만 그 경험이 제 인생을 결정지었습니다. 영어로 상처 받은 사람들을 위해 내가 무언가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지요."
생업에 쫓기는 사람들은 영어를 잘 하기 어렵다. 게다가 영어로 인해 모욕을 당하거나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영어에 대한 두려움도 크다.
"대개 영어를 배우긴 했는데 써먹을 수 없는 게 문제더군요. 미국에서 1년 공부하고도 3형식 문장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사람이 허다해요. 입이나 손으로 출력되지 않는 영어는 자기 것이 아닙니다."
그의 영어학습론의 핵심을 요약하자면 '문법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라' 쯤 된다.
"영어도 규칙언어입니다. 글이 써지고 말이 되는 '법'을 알면 되는 거죠. 문법의 적용을 받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 이것만 구분하면 누구나 영어로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예컨대 전치사 구가 대표적이죠. 영어 문법은 '주어(I)-동사(met)-목적어(the teacher HAN-IL)'에서 거의 끝이 납니다. 이후 덧붙이는 전치사 구는 마음껏 쓸 수 있는 거거든요. 'in Jongro' 'at 11am' 'in order to interview'등처럼 말이죠. 이 전치사구의 활용 정도에 따라 회화 실력이 좌우됩니다."
성인들의 영어 학습법과 관련해서는 "작문 중심"을 강조했다.
"회화에서 사용하는 뇌와 작문할 때 사용하는 뇌의 부위는 같습니다. 더구나 모국어가 완벽하니 외국어로 변형 능력만 있으면 금방 작문과 회화가 될 수 있어요. 영어는 잘 못 쓰면 틀린다는 식의 공포감만 버리면 굉장히 쉽고 재밌는 학습이 될 수 있습니다."
교포들을 상대로 '쉬운 문법' 가르치기에 중점을 두던 그는 2001년 귀국해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했다. 영어로 상처받은 이들이 미국보다 오히려 한국에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사교육 시장보다 공교육의 영역에서 영어 교육의 방법을 바꿔보고 싶었던 그는 자신의 학습 노하우를 담은 영어교재를 만들어 교육대학을 찾아가 "영어 선생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의 뜻은 엉뚱하게 EBS를 통해 이뤄졌다. 기초영문법과 기초영작문 강의가 이른바 '대박'을 친 것이다.
20대 때부터 '불편한 옷'을 과감하게 버리고 적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는 지금도 자신의 결심을 도운 UCLA의 카운슬러에게 고마운 감정을 갖고 있다.
"제가 내려온 결단이 '무모한 것'이 아니라 '과감한 것'이 되도록 길잡이를 해준 충고였지요. 결단은 스스로 내려야 하지만 주변의 충고를 경청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만약 제가 그 카운슬러의 전화를 못 받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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