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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빈의 영화가 좋다] 멋진 하루

입력 | 2008-11-06 08:14:00


옛사랑에 첫 마디는 “돈 갚아!” 희수는 왜 그 말을 했을까요?

사랑이 가장 허무한 순간은 언제일까요? 헤어질 때, 애인의 변심을 확인했을 때?

저는 사랑했던 사람과 재회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이렇게 어색한 상황이 올 거란 생각, 못했습니다. 혹시 헤어지게 되도 ‘쿨’할 수 있을 거야. 웃으며 인사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막연히 상상하곤 했죠.

가슴 저린 이별의 그늘도 희미해지는 어느 날, 이름도 잊을 것 같던 어느 날… 나는 그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낙엽 떨어지는 가을날의 멋진 재회도 아니었습니다. 떠들썩한 지인의 결혼식. 우린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사랑했던 적이 없는 것처럼 어색하게 딴 곳만 쳐다볼 뿐….

그 때 알았습니다. 아름다웠던 사랑도, 결국 말라 비틀어져 영원히 죽어버렸다는 것을.

희수(전도연)가 병우(하정우)를 헤어진 지 꼭 1년 만에 찾아가면서 그들의 멋진 하루는 시작됩니다. 헤어진 연인과 재회한다면 무슨 말을 건네시겠습니까? 아마, ‘잘 지냈니?’정도겠죠?

하지만 희수의 첫 마디는.

“돈 갚아! 내 돈 350만원!”

떨떠름해진 병우는 여기저기 희수를 데리고 다니며 다시 돈을 빌립니다. 이른바 ‘돌려막기’죠. 낭만과는 거리가 먼, 불편한 하루. 그런데 영화가 끝날 무렵 어느새 ‘멋진 하루’가 되어 있답니다.

문득 궁금해집니다. 헤어진 지 1년…. 그 시간은 길수도 있지만 옛 감정이 아스라이 남아있을 법한 시간입니다. 정말 희수는 오로지 ‘돈’ 때문에 병우를 찾아간 걸까요?

병우의 얼굴 위로 한 때 제가 사랑했던 사람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의 재회는 어땠을까요? 옛 감정을 되새김질하는 낭만 따윈 없었습니다. 당황스럽고, 불편했을 뿐.

참 바보 같죠. 왜 난 ‘잘 지냈니?’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을까요? 혹시 희수도 ‘잘 지냈니?’라는 말 한 마디가 돈 갚으라는 말보다 어려웠던 건 아닐까요?

사랑이란 익숙해질 수 있지만, 결코 능숙해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늘 아프고 편안한 재회도 불가능한 건지도 모릅니다. 그도 내가 불편했을까요. 가끔 TV에 나오는 내 모습을 보면 채널을 돌려버릴까요.

희수와 병우는 하루를 함께 하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 듯 혹은 내일 다시 만날 듯 자연스레 인사하고 헤어집니다. 그 때 희수는 살며시 미소를 짓습니다.

이런 생각이 드네요. 나도 그에게 쿨한 미소라도 날려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젠 아픈 이별도 어색한 재회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영원히 나의 것인 사람과의 멋진 하루들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를 바랍니다.

조수빈

‘영화가 좋다’와 ‘뉴스타임’을 진행 중인 꿈많은 KBS 아나운서. 영화 프로 진행을 맡은 뒤 열심히 영화를 보며 삶을 돌아보는 게 너무 좋아 끄적이기 시작함. 영화 음악 프로나 영화 관련 일도 해보고 싶은 욕심쟁이, 우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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