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건국 60주년 기념 세계지도자포럼 참석차 서울을 다녀간 존 메이저 전 영국 총리는 전형적인 영국 신사로 꼽힌다. 그는 점잖은 풍모와 신중한 언변, 부드러운 매너로 ‘정직한 존(Honest John)’이란 평을 들었다. 신사는 정치를 할 수 없다는 통념이 없지 않지만 하원의원 재무장관 외교장관을 거쳐 정치인의 꿈인 총리를 7년이나 지냈다.
영국이 의회 민주주의의 본산이라고 해서 그 나라 정치인들이 정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치의 본질적인 속성의 하나는 권력다툼이고 영국 정치인들도 생각과 이해관계가 다른 경쟁자들과 치열하게 논쟁을 벌인다. 런던의 의사당에선 서로 마주보고 앉은 여야 의원들이 의장에게서 발언권을 얻기 위해 마치 학생들처럼 경쟁적으로 손을 드는 것을 일상적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그들은 상대를 몰아세울 때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거친 말을 삼간 채 풍자와 위트가 넘치는 표현을 쓴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람 좋은 메이저 전 총리라고 남에게 덕담만 했을까. 그는 재임 시절 뭐든지 정부 탓만 하는 한 야당 의원에 대해 “홍역에 걸려도 하원의 각료석(Treasury Bench)에서 옮았다고 말할 것 같다”고 꼬집은 일이 있다.
메이저 전 총리는 또 역량이 의심스러운 야당 의원을 겨냥해 “존경하는 의원님은 비싼 교육을 받았는데 과연 교육비가 제대로 쓰인 것인지 알 수 없다. 의원께서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내가 세금을 낸 것이 특권이었는지 의문이다. 내 세금을 돌려받고 싶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라면 싱거운 소리로 들릴 수 있지만 영국에선 정치적 모욕의 사례를 다룬 책에 실릴 만큼 신랄한 발언이었던 모양이다.
정치인들이 상대를 비판할 때조차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재치 있는 유머로 유쾌한 웃음을 자아내는 것은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선 보편적인 일이다.
그레그 나이트 영국 하원 의원은 ‘품격 있는 모욕(Honourable Insults)’이라는 저서에서 정치인들이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저속한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의 지적 수준과 어휘력이 낮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은? 최근 끝난 국정감사에서도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등에선 정제되지 않은 폭언이 난무했다. 그중엔 시정잡배들을 연상시키는 민망한 것들도 있다. 앞으로 본격적인 법안 심사와 새해 예산안 심사에 들어가게 되면 훨씬 더 험악한 장면이 벌어질 것이다.
여야가 서로를 공격하는 게 불가피하다면 표현 방법에라도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한다. 의도적이든, 혹은 순간적인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서든 의원들이 난폭한 말을 뱉어내고도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국민만 불행하다. 한심스러운 의원들의 행태를 접할 때면 그 의원의 지역구가 어디인지 살펴보곤 한다. 그런 사람을 지역의 대표로 뽑은 주민들이 정말 딱해서다. 의원들의 저급한 발언을 지켜보는 건 사실 취재 기자들에게도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이다.
차림새뿐만 아니라 품성과 행동에서도 신사다운 의원을 기대하는 건 우리의 정치 현실에선 연목구어(緣木求魚)인가. 메이저 전 총리처럼 정직한 이미지의 정치인이 한국에도 있으면 좋겠다.
한기흥 정치부장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