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觀音)에 문향(聞香). 이걸 동양적 허풍이라고 할지, 아니면 관념적 서정이라고 할지. 그 한자 뜻부터 보자. 관음이란 ‘소리를 보다’고, 문향이란 ‘향기를 듣다’다. 그 소리는 세음(世音), 즉 중생의 기도소리다. 그 소리에 귀도 모자라 눈까지 기울이는 이, 다름아닌 관세음보살이다. ‘캐논’은 관음의 일본어 발음이자 카메라의 브랜드 네임이다. 눈으로 소리를 보듯 중생의 한마디 기도도 놓치지 않으려는 관세음보살처럼 정밀하게 사물을 담아내겠다는 지극정성의 의지가 담긴 작명이다. 귀로 듣는 그 향기란 한겨울에 꽃 피우는 매화의 암향(暗香)을 말한다. 날 듯 말 듯, 있는 듯 없는 듯한 매화향. 그래서 그 향은 코뿐 아니라 귀까지 동원해 들을 수밖에. 이렇듯 관음과 문향은 그 자체가 지극한 정성을 표현한 동양적 서정의 극치다. 프랑스의 보르도 지방으로 떠나는 와인기행 역시 같다. 서울에 앉아 글라스에 따라 마시는 병 안 포도주의 향과 맛으로 성에 차지 않는다. 술이라는 것이 토양과 기후, 그리고 노력의 산물임을 인정한다면 그 자연과 사람을 보지 않고서야 어찌 그 맛을 평하고 탐할 수 있을까. 와인이야말로 서양 것 가운데 유일하게 관음하고 문향할 만한 산물이다. 주조용 포도의 지존인 ‘카베르네 소비뇽’이라는 포도 품종을 전 세계에 퍼뜨리고 와인 천국 프랑스에서도 최고의 산지로 손꼽히는 남부 프랑스의 보르도, 그중에서도 ‘와인의 황제’라는 1등급 그랑크뤼 와인이 생산되는 메도크(Medoc). 메도크 지역으로 관음과 문향의 와인기행을 떠난다.》
○ 세계 와인의 수도, 세계유산의 도시 보르도
보르도는 두 개다. ‘세계 와인의 수도’라는 포도주의 보르도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18세기 건축의 도시 보르도다. 이 도시도 최근 보르도와인연합회(CIVB)가 ‘와인관광(Wine Tourism)’을 마케팅 전략으로 펴면서 찾는 이가 늘고 있다.
보르도에서 안 사실 하나. 나폴레옹 3세가 파리를 중세적 때를 벗고 모던한 도시로 바꾸려 할 때 그 모델로 제시된 곳이 바로 이 도시라는 것이었다. 18세기 보르도는 그만큼 앞서가던 도시였다. 도시의 잠재력은 건축으로 표출된다. 그리고 건축의 기반은 돈이다. 그런 만큼 보르도는 18세기 유럽에서 잘나가던 도시 중 하나였음에 틀림없다.
그 재력의 기반은 물론 와인이다. 보르도가 항구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나는 보르도 구 도심의 가론 강변을 찾았다. 지금은 유람선이나 드나드는 한산한 강이지만 18세기만 해도 굴지의 무역항이었다. 그 역사는 12∼15세기 300여 년간 영국과의 와인교역에서 비롯됐지만 본격적인 무역은 와인의 장기보관법이 개발돼 먼 나라로 수송이 가능해진 18세기에 시작됐다. 비법은 네덜란드 상인에 의해 개발됐다. 그래서 그즈음 보르도는 네덜란드 상선으로 북적댔다.
강변의 부르즈(Bourse) 광장. 무역항 보르도의 역사는 광장가의 고풍스러운 18세기 석조건물군이 증언한다. 옛 궁궐과 증권가인 이곳은 ‘보르도의 월스트리트’다. 건물 뒤는 구 도심. 18세기 의회와 14세기 생피에르성당, 보르도박물관, 17∼19세기 건물에 둘러싸인 팔레 광장 등 고색창연한 구 시가가 펼쳐진다.
전차가 오가는 큰길을 건너 강변으로 가보자. 옛 항구의 야적장은 수변공원으로 개발됐다. 거기에 특별한 어트랙션이 있다. ‘물의 거울’이라는 작품인데 일정 시간이 되면 광장 바닥을 물로 적셔 연못처럼 만든다. 그러면 그 수면이 거울이 되어 주변을 담아내며 기막힌 풍광을 선사한다. 그 물은 바닥에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한 분사구를 통해 안개처럼 뿜어져나온다.
보르도는 온통 석조 건물이다. 그 사이로 느릿느릿 전차가 다닌다. 1층 길가의 테라스에는 언제나 커피나 와인을 홀짝이는 사람들이 앉아 있다. 그 중심은 코미디 광장. CIVB는 거기에 있다. 그리고 1층에 멋진 와인 바도 있다. 보르도에서 와인 클래스를 듣자면 이곳에 가면 된다. 프랑스어와 영어로 한두 시간짜리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에콜 드 뱅(와인학교)’이 그 건물에 있다. 코미디 광장의 얼굴은 열주 12개가 정면을 장식한 그랑테아트르(대극장)다. 그 건물 옆으로 생카트린 거리가 있다. 서울의 명동거리 같은 쇼핑가다.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 , 명품을 빚다
○메도크 와인의 재탄생,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
1855년 5월 15일.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런던에 이어 4년 만에 열린 엑스포다. 34개국이 참가하고 6개월간 516만 명이 다녀갔는데 그해 주제는 ‘농업과 산업, 그리고 보자르(예술)’였다. 그 주제관 가운데 하나인 농업관에는 프랑스 와인이 전시됐다. 보르도산이었다.
당시 통치자는 나폴레옹 3세(1808∼1873). 황제는 런던 만국박람회에서 하이드파크에 등장했던 최신 공법의 유리건물 ‘크리스털 팰리스’에 자존심이 상했었다. 그래서 파리박람회에 무척이나 신경을 썼다. 신공법 건물도 짓고 보자르 예술을 동원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자랑인 와인까지 동원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보르도 와인이었을까. 시간은 거슬러 12세기 초. 보르도는 당시 아키텐 공국의 중심이었다. 1152년 공국의 엘레오노르 공주가 영국 왕 헨리 2세와 결혼했다. 이때 지참금으로 영국에 희사한 것이 이 아키텐 공국, 보르도 땅이었다. 1453년 카스티용 전투로 이 땅이 프랑스에 반환되기까지 보르도는 프랑스에 있는 영국 땅이었다.
당시 보르도 주민들은 어땠을까. 매년 두 차례, 부활절과 성탄절이면 200척의 배에 와인을 실어 영국에 보냈다. 덕분에 영국은 300년간 최고의 보르도 와인을 힘들이지 않고 마실 수 있었다. 보르도 와인이 그때부터 영국인에게 정평났음은 물론. 그러니 경쟁심에 불탄 나폴레옹 3세가 만국박람회에 보르도의 최상급 와인을 전시해 영국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은 것은 당연한 욕심이었다.
그런데 당시 보르도 와인에는 등급이 없었다. 그래서 황제는 최고급 와인을 선별하는 등급기준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기준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그 일을 맡은 곳은 보르도 상공회의소. 그들은 와인중개상조합에 의뢰했고 중개상은 와인시세로 기준을 마련해 등급을 매겼다.
보르도는 생산하는 와인의 특징에 따라 지역을 6곳으로 나눈다. 그런데 당시 등급판정을 받은 지역은 가론 강과 지롱드 강의 왼쪽에 있는 ‘메도크, 그라브’(현재 생산량으로는 전체의 17% 차지)와 소테른(스위트 화이트와인 생산지) 두 곳뿐. 이렇게 해서 메도크 지역에서 60개, 그라브 지역의 1개 등 샤토 61개가 그랑크뤼 1∼5등급으로 분류돼 출품됐다. 이게 ‘보르도 1855년 등급’이다. 이 등급은 어찌나 정확했던지 지금도 이의없이 통용된다. 딱 한 곳만 예외적으로 등급이 재조정됐는데 1973년 2등급에서 1등급에 오른 샤토 무통 로칠드가 그것.
○메도크의 ‘와인가도’(街道) D2 드라이빙
와인애호가라면 누구든 기억하는 이름이 있다. 라투르, 마르고, 무통 로칠드, 오브리옹, 라피트 로칠드 같은 최고급 와인이다. 모두 ‘1등급 그랑크뤼 클라세 메도크’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누구든 보르도에 발을 디디면 이들 와인이 생산되는 메도크의 샤토부터 찾기를 원한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1등급 와인이 생산되는 샤토 5개 가운데 세 개가 한곳에 있다. ‘포이야크’이라는 곳이다.
보르도 시내를 떠난 지 30분쯤. 나지막이 여린 구릉이 대지를 덮고 그 한끝으로 수면에 반사되는 햇빛의 반짝임이 수려한 강변의 포도원에 도착했다. 포이야크다. 2차로 도로는 가지런히 줄지어 선 포도나무의 과수원을 가로질러 저 너머 구릉 아래로 사라졌다. 그 길로는 이따금 포도밭을 일구는 데 쓰는 커다란 중장비만 오갈 뿐 오후의 포이야크는 한산하기 이를 데 없는 농촌이었다.
그 길을 지나다 장원의 고성을 방불케 하는 멋진 건물 앞에 차를 멈췄다. 돌문의 벽에 이렇게 쓰여 있다. ‘샤토 라투르’. 아직 마셔본 적 없이 명성만 들었던 보르도 최고 와인 라투르의 포도원이었다. 강을 향해 부드럽게 경사를 이루며 조성된 포도밭 한가운데로 탑 모양의 원형 건물(라투르)이 보인다. 와인 레이블에도 등장하는 이 샤토의 랜드마크다.
포도 산지는 프랑스든 이탈리아든 드라이브코스로 그만이다. 사방이 온통 과수원인 데다 마을도 띄엄띄엄 들어서 전원의 풍치를 흠뻑 맛볼 수 있어서다. 메도크 지역도 같다. 북동쪽으로 뻗은 D2도로는 와이너리 투어의 중요 루트다. 북쪽 대서양을 향해 흐르는 지롱드 강을 따라 오메도크와 마르고, 생쥘리앵, 포이야크를 관통, 생테스테프와 최북단 메도크 지역까지 두루 섭렵한다. 그리고 전설적인 샤토가 그 길 중간에 숨어 있다.
무엇이 보르도 와인을 최고로 만든 것일까. 와인투어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이튿날. 나는 보르도와인연협회가 운영하는 에콜드뱅(와인학교)에서 2시간 코스의 보르도 와인 강의를 들었다. 영어로 진행되는데 보르도 와인에 대한 입문 지식을 총망라해 전달한다. 물론 시음과 더불어. 거기서 얻은 해답은 간단했다. 보르도 와인의 비밀은 토양과 기후, 그리고 2000년간 축적된 기술과 노력이다.
이후 나흘간의 와인투어. 이것을 하나하나 검증해주는 산 교육이었다. 토양과 지형, 기후 그리고 기술. 이 셋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토양과 지형’이었다. 보르도 사람들은 말한다. 포도밭에서 강이 보이거든 무조건 좋은 와인이 생산되는 줄 알라고. 모든 1등급 포도밭은 모두 지롱드 강을 향해 살포시 경사를 이룬 구릉에 조성돼 있었다. 걸프 스트림이 흐르는 대서양(서쪽)과 지롱드 강(동쪽) 사이에 놓인 이 반도지형의 땅 메도크(Medoc). 그 이름 자체가 ‘두 물 사이’라는 라틴어에서 왔다는 점만 보아도 이 지형이 메도크 와인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와인에 가치를 더하는 보르도의 와인관광
포이야크에서 샤토 랭슈바즈에 들렀다. 1855년 당시 판정은 5등급이었는데 지금 판매가는 2등급 가격이어서 늘 화제가 되는 와인이고 샤토다. 그 샤토에서 나는 또 특별함을 발견했다. 양조장 안팎을 현대 회화작품으로 장식한 것, 동네 건물을 사들여 아담한 휴식처로 가꾼 ‘새로운 투자’다. 그것은 와인을 단순한 술이 아니라 문화를 함축한 음료로 규정하는 장 샤를 카즈(카즈 가문의 4대째 운영자) 씨의 말을 통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이것 역시 와인투어의 새로운 전략이라는 설명인데 이 모두가 랭슈바즈 와인을 특별하게 만들기 위한 전략이었다.
1등급 와인의 샤토는 방문허락을 받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렵다. 찾는 이가 많아서인데 운 좋게도 샤토 마르고는 방문할 수 있었다. 메를로 포도 품종을 중심으로 만든 우아한 마르고 와인을 고색창연한 테이스팅 룸에서 아침 햇살 속에 음미한 것은 오래도록 기억될 만큼 특별했다. 샤토 마르고는 그 우아한 향과 맛처럼 샤토의 성채와 그 성채로 이어지는 가로수 정원 길 또한 멋지다.
와인투어는 요즘 보르도에서 활발한 새 트렌드다. 단순히 와인을 파는 데만 그치지 말고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까지 담아 보르도와 그 산물인 와인의 가치를 좀 더 높이자는 게 목표다. 이 전략은 199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의 나파밸리가 선구자이다. 그러나 실제로 보르도에 가서 보니 도구는 같아도 내용이 확연히 달라 퇴색한 전략의 재활용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보르도 와인에 대한 사랑과 애착을 더더욱 간절하게 만드는 좋은 도구였다.
샤토 아가삭(오메도크 지역)에서는 아이팟을 활용한 셀프 샤토투어로 가족중심의 와인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또 샤토 라네상(오메도크)과 샤토 다르슈(소테른)는 옛 건물을 깔끔하게 수리해 고성 콘셉트의 호텔로 활용하며 자신들의 와인에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와인은 음식과 절대로 뗄 수 없는 음료다. 보르도에 산재한 1000개의 레스토랑은 그런 보르도의 와인을 더욱 빛나게 한다. 어느 레스토랑에 가든 자기가 좋아하는 와인 한두 병쯤은 늘 만날 수 있는 곳이니만큼 보르도 와인투어에서 구어메(식도락)는 월간지의 부록처럼 따라붙는 상시 보너스다.
글·사진=보르도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디자인=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 잊지못할 특별체험 두가지
① 고성 호텔에서 하룻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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