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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모가 만난 사람] 한국 록의 2세대 선두주자 가수 함중아

입력 | 2008-11-08 07:57:00


“혼혈처럼 살았지만 혼혈가수 아니었다”

키보이스, 김홍탁의 히파이브·히식스, 신중현의 덩키스·퀘션스, 윤항기의 키브라더스, 김태화가 소속돼 있던 라스트찬스, 최근 영화 ‘고고70’으로 재조명을 받고 있는 데블스 등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7∼8년은 가히 한국 그룹사운드의 황금기였다.

특히 이들 그룹사운드 1세대들은 한국적 사이키델릭록을 선보이며 젊은 세대로부터는 숭배에 가까운 환영을, 언론으로부터는 ‘사대주의+버르장머리 없는 음악’이라는 이유로 가혹한 집중포화를 두들겨 맞았다.

1975년은 한국 록 음악사에서 암흑의 시기로 분류된다. 장발단속에 이어 연예계 전반에 불어 닥친 대마초 광풍에 직격탄을 맞은 수많은 그룹들이 해체 또는 잠적의 궤도에 올라서야 했다. 무대는 무주공산이 되어버렸고, 빈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2세대들의 가열찬 몸싸움이 물밑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함중아가 한국 록 세계에 등장한 것은 이즈음의 일이다. 1974년 그룹사운드 경연대회 우승자 출신인 함중아는 1978년 ‘안개속에 두 사람’을 터뜨리면서 세상에 나왔다. 비슷한 시기에 윤수일이 등장했다. 함중아와 윤수일은 혼혈가수로 주목받으며 한국 그룹사운드의 중심으로 급부상했다.

경북 포항에서 함중아는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복잡한 가정사로 인해 어려서 형제가 뿔뿔이 흩어졌다. 함중아는 바로 윗형인 함정필과 함께 경기도 파주로 올라왔고, 전쟁고아와 혼혈아동을 돕는 펄벅재단에서 자랐다.

하루는 김영길이라는 또래의 친구가 재단을 찾아왔다. 영화 시나리오를 하나 썼는데 뮤지컬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세대들’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로 한국아이들과 혼혈아들의 갈등을 소재로 하고 있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철없는 소년들은 신영균, 김지미 등 당대의 은막스타들을 찾아다니며 시나리오를 보여줬다. 물론 모두 ‘빠꾸’였다.

○신중현씨 찾아가 제자입문 록 인연

“마지막으로 찾아간 것이 신중현 씨였어요. 신촌 연세대 근처에 사무실이 있었지. 신중현 씨가 우리를 보더니 측은하기도 하고, 이국적으로 생긴 것이 특이하기도 하고 … 그래서 제자로 받아줬죠. 그때 우리가 한 10명 됐을 거예요.”

함중아와 친구들은 2년가량을 신중현 밑에서 수련했다. 숙식은 아현동에 있던 김영길의 집에서 해결했다. 김영길의 집은 밀가루로 꽈배기, 도넛 등을 만들어 파는 일을 했다. 우르르 몰려들어 꽈배기와 도넛을 만들고, 새벽 4시가 되면 리어카를 끌고 남대문시장에 배달을 나갔다.

“신중현 씨가 워낙 바쁜 분이니 제대로 가르칠 시간이 없죠. 그냥 옆에서 보고 배우는 거예요. 당시 신중현 사단 중에서는 펄시스터스가 최고 스타였지. 사무실에 있다 보면 가수들이 참 많이 찾아왔어요. 바니걸스, 김추자 등등. 옆방에 있으면 연습하는 게 다 들려요. 보고, 듣고, 우리끼리 해보고 … 그렇게 배우는 거죠.”

제대로 된 악기가 있을 리 없었다. 통기타라도 든 함중아는 행복한 축이었다. 오르간을 맡은 형 함정필은 베니어판에 건반을 그려놓고 손 짚는 흉내만 내야 했다. 보다 못한 신중현이 아리아 풍금 한 대를 가져다주었다.

신중현 사단 중에는 ‘미련’, ‘나는 너를’을 부른 가수 장현도 있었다. 평소 함중아 일행이 고생하는 모습을 안쓰럽게 보던 그는 친구가 사장으로 있는 대구 수성호텔 나이트클럽을 소개해 주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싶었죠. 그런데 악기가 있나. 부산 큰 누나한테 20만원을 얻었죠. 그 돈으로 청계천에 나가서 4인조 악기를 다 샀어요.”

대구 나이트클럽 무대에 올랐다. 일단 스승의 흉내를 내기로 했다. 신중현 연주 스타일에 그의 레퍼토리를 그대로 읊었다.

“그때는 소울이 유행할 때였어요. 나이트 음악문화가 정말 조용한 분위기였지. 그런데 머리가 치렁치렁한 우리들이 가서 시끄럽게 하니까, 이게 영 아닌 거라. 하루 딱 하고 쫓겨났습니다.”

서울로 올라온 패잔병 무리를 보고 장현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번엔 대전 유성호텔로 가보라고 했다. 거기서 6개월 정도를 일했다.

○2년간 스승과 골든그레이프스 활동도

하루는 신중현이 대전에 왔다가 클럽에 들렀다. 사장하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무대에서 주구장창 자신의 레퍼토리만 들리는 것이 아닌가.

“본인 제자들인 줄 몰랐던 거죠. 사장한테 ‘쟤들 누구요?’했다는 겁니다, 하하! 당장 짐 싸들고 서울로 올라와서 오디션을 보라고 하시더군요.”

당시 신중현은 퀘션스를 해체하고 홀몸이었다. 신중현은 서울로 올라온 옛 제자들의 그룹에 멤버로 들어왔다. 그래서 신중현과 골든그레이프스가 만들어졌다. 신중현과 골든그레이프스는 2년 정도 갔다.

이후 신중현은 ‘엽전들’을 만들어 나가고, 함중아는 ‘신중현’이란 간판을 뗀 채 골든그레이프스를 이끌었다.

○1974년 그룹쟁탈전 1등 ‘최고의 순간’

1974년. 당시 유행하던 그룹사운드 경연대회가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렸다. 주간경향컵 그룹쟁탈전이란 대회였다. 여기서 1등을 ‘먹었다’. 지금까지도 함중아가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꼽는 무대였다.

“신중현 씨 앰프를 몰래 들고 나갔죠. 그런데 이게 공연을 하다 펑 터져버린 거야. 아주 귀한 건데. ‘야, 이거 우리 죽었구나’싶었지. 그래서 머리를 짜 낸 게 … 상패가 큰 컵이었는데 여기에다 술을 가득 따라서 받쳐 들고 갔어요. 물론 무지하게 혼났지. 그러면서도 제자들이 1등 했다니까 좋아하시더라고. 흐흐흐”

○팀 해체후 형이 손잡은‘윤수일과…’ 경쟁

이 즈음에서 그룹 내에 내분이 생겼다. 형 함정필과의 음악적 갈등이었다. “형은 길이 좀 달랐어요. 형은 흑인들 음악, 그러니까 리듬 앤 블루스 쪽을 선호했고 나는 하드락이었거든. 음악 갖고 티격태격 많이 싸웠죠. 결국 골든그레이프스를 해산하기로 결정했죠.”

4인조가 둘씩 찢어졌다. 지금까지도 음악 동지로 활동하고 있는 드러머 제임스 성은 당시 형을 따라 나섰다. 함중아는 두 명의 빈 자리를 채워 ‘함중아와 양키스’를 만들었다.

형은 형대로 함중아가 빠진 자리에 기타리스트를 채웠다. 그게 바로 ‘아파트’의 국민가수 윤수일이었다. 형의 그룹은 ‘윤수일과 솜사탕’으로 명명됐다. 함중아와 윤수일은 이처럼 애당초 라이벌일 수밖에 없는 미묘한 인연으로 엮여 있었다.

“함중아와 양키스를 만들어 대구 수성호텔에서 일을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77년에 윤수일이 부른‘사랑만은 않겠어요’가 무지하게 뜨는 거라요. 열 받잖아. 지방에서는 안 되겠다 싶어 서울로 부랴부랴 올라와서 취입을 한 게 ‘안개속에 두 그림자’였죠.”

두 사람의 라이벌전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81년 윤수일이 ‘떠나지마’와 ‘아파트’를 연달아 터뜨리자, 함중아는 불후의 명곡 ‘내게도 사랑이’로 맞불을 놓았다. 윤수일이 ‘환상의 섬’을 정상에 올리니 함중아는 ‘카스바의 여인’을 내놓는 식이었다.

○혼혈가수 전성기라 혼혈인 양 살았죠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혼혈가수로 알려진 함중아는 사실 혼혈이 아니다. 그가 펄벅재단에서 성장했고, 실제로 혼혈친구들과 함께 음악을 했으며, 심지어 그룹 이름이 ‘양키스’라는 데에서 온 오해였다. 짙은 쌍꺼풀에 흰 피부. 앳된 귀공자풍의 외모가 ‘혼혈가수 함중아’의 이미지를 더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혼혈이 아님을 밝히지 않고 지내왔다.

함중아와 윤수일이 등장하면서 국내에는 혼혈가수들의 왕성한 활동이 이어졌다. 희자매의 인순이가 있었고, ‘오, 진아’의 박일준도 가수로 데뷔했다. 언더그라운드에서는 혼혈 음악인들이 크게 늘었고, 대우와 시선이 달라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가 굳이 자신이 혼혈이 아님을 공표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조용필 만난후 기타보다 노래에 빠져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함중아는 본래 가수가 아닌 기타리스트 지망생이었다. 무대에서 노래를 하긴 했어도 마음은 늘 연주에 가 있었다.

스스로 지은 예명 ‘중아(重亞)’는 ‘세계적은 몰라도 아시아에서만큼은 묵직한 기타리스트가 돼보자’하는 뜻이었다.

서울 북악파크호텔 나이트클럽 시절 일이다. 두 팀이 교대로 무대에 올랐는데 하나는 함중아팀이고, 다른 한 팀이 ‘조용필과 그림자’였다. 공교롭게도 두 팀은 종로2가 웨스턴살롱에도 같이 출연했다.

“조용필과 그림자는 주로 일본노래를 했어요. 그런데 너무 잘 하는 거라. ‘저 사람은 감기도 안 걸리나’싶을 정도였다니까. 난 그 사람, 지금보다 무명 때 노래를 더 잘 했던 거 같아.”

하루는 무대 뒤로 조용필을 찾아가 “노래 좀 가르쳐 주면 안 돼요”했다. 조용필이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할 때 테이블에 앉아 레퍼토리를 베꼈다. “처음 쫓겨났던 대구 수성호텔에 다시 내려갔죠. 그 전까지는 신중현 씨 곡을 했는데, 이번엔 조용필 씨 흉내를 내 본 거라. 그런데 이게 반응이 확 옵디다. 난리가 아니었지. 그래서 내가 노래에 빠졌다는 거 아닙니까. 그 이후로는 기타를 등한시 했지. 하하!”

○고향에 라이브 클럽“후배하나 키워야죠”

오랜 부산생활을 접은 그는 최근 고향인 포항으로 돌아와 오광장에 ‘7080라이브클럽’을 열었다. 그의 마지막 바람은 이 클럽을 포항의 최고 명소로 만드는 것, 그리고 좋은 후배가수 한 명을 키우는 것이다.

“이거, 옛날 얘기만 하니까 좀 그러네. 벌써 내 나이가 이렇게 됐나.”

새벽 5시, 포항의 감자탕 집에서 기자에게 “1시간만 더 있다 올라가라”며 함중아 씨가 소주잔을 내밀었다. 가장 한국적인 록을 구사하는 신중현의 음악적 어법에 젊은 시절 영향을 받은 산타나의 남미풍 리듬을 접목시키고, 하드록에 트로트를 섞은 ‘세미 트로트록’, ‘고고록’을 창시한 함중아. 육체는 아닐지 몰라도, 그는 분명 ‘음악적 혼혈’을 타고난 사람일 것이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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