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생일 파티를 하는 가족을 본 적이 있었다. 인상 좋아 보이는 아버지가 종업원들에게 귓속말을 하고나니, 이내 종업원들은 고깔모자와 기타를 들고 나타났다. 생일축하노래 가락에 맞춰 대여섯 살쯤 돼 보이는 아이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특별한 사람임에 감동받은 눈치였다.
잠시 뒤 옆 테이블에서도 한 가족이 앉았고, 종업원들은 똑같은 고깔을 쓰고 나타났다. 이번에도 똑같은 축가가 울렸지만 방금 전까지 밝았던 아이는 좀처럼 웃지 않았다. 약간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옆 테이블을 바라볼 뿐. 잠시 뒤 ‘축하’라는 감정은 또다시 복제돼 다른 테이블들을 떠돌고 있었다. 아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최초의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청계천의 어스름한 저녁. 그 아이와 똑같은 표정을 봤다. 20분에 3만원하는 마차(馬車) 위에서였다. “어이, 비켜라. 왕자님 나가신다.” 마부의 목청에 몰입했던 아이는 또 다른 마차에서 들려오는 똑같은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순간 말의 표정은 ‘멍’했다. 초겨울의 시린 바람이 말의 눈가를 때려서인지 눈물도 고인 듯 보였다. 잠든 김유신을 술집으로 인도했다가 목이 베였다는 애마보다도 더 애처로웠다.
장승업의 그림에서처럼 튀어오를 듯한 말이 보고 싶었다. 영화 ‘각설탕’의 천둥이와 임수정처럼 말과 교감을 나누고 싶었다. 그것은 분 당 얼마의 가격으로 복제될 수 없는 것이라 믿었기에, 과천 KRA한국마사회 승마단을 찾았다.
○환상은 깨지고
집을 지어보지 않은 사람은 집을 지붕부터 그린다. 하지만 집을 지어본 사람은 주춧돌부터 그린다. 상상은 자유지만, 경험하지 않은 일을 마음대로 꿈꾼다는 것은 역시 위험하다.
일단, 복장을 갖추는 것부터 녹록치 않았다. 박재홍(43) 감독과 전재식(41) 코치가 준비해준 부츠와 바지, 그리고 모자. 바지는 허리통에 억지로 맞춰 넣었지만 부츠는 굵은 장딴지를 덮을 수 없었다. 결국 특대형을 꺼내왔다. 부츠는 멋뿐만 아니라 안장에 다리가 쓸리는 것을 막아준다. 모자는 특대형도 안 통한다. 계속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절대로 벗을 수 없다. 낙마사고를 대비한 일종의 안전벨트이기 때문. 말 앞에 서기도 전에 환상이 깨졌다.
기다리던 말과의 만남. 말의 이름은 드라이버(Driver)3. 승마용 말에는 국제승마연맹(FEI)이 부여한 등록증이 있다. 대부분 수입 말이기 때문에 등록증에 표기된 이름은 대개 외국어로 돼 있다. 드라이버3의 품종은 웜블러드(WarmBlood). 웜블러드는 주로 승마에 쓰인다. 스피드가 중요한 경마에서는 서러브렛(Thorough Breed)을 애용한다.
드라이버3의 나이는 16세. 말의 수명이 25년 정도이니 이미 장년에 접어든 말이다. 공식경기에서는 이미 은퇴했다. 인사를 했는데도 묵묵부답. 전 코치는 “말과 인간의 소통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라”고 했다. 말은 목덜미 부분을 쓰다듬어 주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콧등의 접근은 싫어한다. 살짝 만져주니 꼬리를 치켜세우며 행복감을 표현한다. 최초의 대화였다.
○무거워서 미안해
말에 오를 차례. 말에는 왼쪽으로 접근하는 것이 국제적인 룰이다. 절대로 뒤쪽에 서는 것은 금물. 말은 경계심이 많아 뒤쪽에 서있으면 위해요인으로 여기고, 방어수단으로 뒷발질을 한다.
왼손으로는 양쪽 고삐와 갈기를 함께 쥐고 오른손으로 등자쇠(발걸이)를 자신의 앞쪽으로 돌린다. 왼발을 등자쇠에 끼우고 오른손은 안장을 잡고 몸을 안장 쪽으로 돌린다. 오른쪽 다리를 말의 몸에 닿지 않게 돌려 오른발을 등자쇠에 끼운다.
말에 오르자 무게감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기수의 체중이 가벼워야 절대적으로 유리한 경마와는 달리 승마기수들은 60-70kg이 적당하다. 전 코치는 “(기수가) 너무 가벼우면 말을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없다”고 했다.
승마의 기본은 기마자세다. 가슴과 등을 곧게 펴는 것이 관건. 고삐를 당기며 “이랴!”라고 하면 말이 출발한다는 것은 순 거짓말이다. 고삐를 당기면 말 입에 물린 재갈이 말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말이 멈춘다. 입으로 소리를 내거나, 승마구두에 달려있는 박차로 말을 때려서 말의 걸음을 떼게 한다.
말이 걷기시작하자 몸이 공중에 떠있는 기분이다. 평보는 시속 6km정도. 말은 한번 의식한 것은 6개월간은 잊지 않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다. 나중에는 가만히 있어도 말이 알아서 정해진 길을 가는 느낌이다. 평지보다 높아진 시선에 우쭐해 질 때 쯤. 갑자기 말이 멈춰 섰다. 무언가 묵직한 것이 뒤에서 나가는 느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말의 변(便)이었다. 혹시 기수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전 코치는 “심지어는 경기 중에도 이런 경우가 있다”며 웃었다.
○한 턱 쏘지 않게 해줘
속보는 시속 15km정도. 박차를 조금 더 세게 가하자 드라이버3가 반대쪽 앞뒤다리를 동시에 움직였다. 말도 사람의 무게를 느끼겠지만, 사람도 지면을 박차는 말의 기세(氣勢)에 놀란다. 말이 편안하게 뛰려면 발굽이 지면에 닿는 순간 기수가 살짝 일어나서 말에게 눌리는 무게감을 최소화시켜야 한다. 앉았다가 섰다를 반복하는 리듬을 익히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속보를 하자 확실히 오장육부에 힘이 들어간다. 승마는 허리를 유연하게 하고, 골반을 튼튼하게 한다. 장 기능이 강화되는 효과도 있다.
땀방울을 식혀주는 바람, 말, 그리고 기수가 하나가 되는 순간. 전 코치의 한 마디가 귓전을 때린다.
“밀가루 반죽하세요? 고삐를 흔드시면 안됩니다.” 속보의 리듬감을 맞추겠다는 생각이 손에까지 미쳤다. 고삐를 흔들면 말은 불쾌감을 크게 느낀다. 어쩐지. 말의 킁킁거림과 함께 진동이 커졌었다. 덩달아 낙마에 대한 두려움도 생겼다.
박 감독은 “승마인들 사이에는 낙마턱이 있다”고 했다. 살짝 떨어지면 음료수 정도로 때울 수 있지만, 쇄골이라도 부러지면 정말 크게 내야한다. 어쨌든 살아있어 다행이라는 의미다.
“제발, 한 턱 쏘지 않게 해주렴.” 말귀를 알아듣는지 모르겠지만 드라이버3와의 대화시도는 더 잦아졌다.
기수들은 쉬는 날이면 마방(馬房)을 청소하기도 하고, 홍당무를 입에 넣어주며 말에게 애정을 표현한다. 체험이 끝나고 말에게 각설탕을 내밀자 손바닥만한 혀가 각설탕을 훑고 지나갔다. 마치 사람의 손으로 말의 혀와 악수를 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고삐를 흔들어 진동이 커졌던 것을, 잠시나마 “안전하게 못 달린다”며 말을 원망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남 탓하기에 바빠 반성에 소홀한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을까. 무감어수 감어인(無鑒於水 鑒於人, 물에다 자신을 비추지 말고 사람에게 자기를 비춰보라)이라 하였지만, 감어마(鑒於馬)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승마의 매력은 충분했다.
과천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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