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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호 칼럼]이름과 실속을 따져보자

입력 | 2008-11-13 02:59:00


나이를 먹으면 기억력이 떨어진다. 친했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얼른 이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곤혹스럽다. 친하지 않은 사람 이름은 신문에서 몇 번 봐도 도무지 외지를 못한다.

나는 새 정부의 장관 이름을 서너 사람밖에 모른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애쓰셨는가 생각하면 이건 대단히 미안한 결례이다. 그분들의 이름을 외도록 앞으로 노력할 작정이다. 민망스러운 것은 장관의 이름만이 아니라 그가 장으로 있는 정부 부서의 이름도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유럽에는 내각의 ‘고전적’ 부서라는 것이 있다. 외무, 내무, 법무, 재무, 국방부가 그것이다. 복수의 정당이 연정 수립 협상을 할 때도 고전적 부서의 배정에 신경을 쓰는 듯하다. 나라살림의 발전과 다양화에 따라 정부 기능이 확대되면서 문화, 상공, 농업, 노동부 등의 부서가 19세기에 등장했다. 20세기에 들어와 정부는 커지고 조직은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정부 조직의 근간으로 고전적 5개 부서와 그 이름은 그대로 지니고 있다.

정부부서 명칭 너무 자주 바뀌어

우리나라 정부 부서 이름은 변화무쌍한 정당 이름만치 자주 바뀐다. 지방자치를 수백 년 해온 나라도 내무부는 내무부인데 우리는 지자제를 도입하면서 정부 수립 후 50년을 지켜온 내무부 이름을 1998년 행정자치부로 바꾸더니, 올해 새 정부가 들어서자 불과 10년 만에 다시 행정안전부란 아리송한 이름으로 개명했다. 지식경제부가 무엇인지 둔한 머리론 이름만 들어선 알 수가 없다. 그 대신 ‘농림 수산 식품 부’나 ‘보건 복지 가족 부’, 또는 ‘교육 과학 기술 부’란 이름은 나처럼 어수룩한 사람도 그곳이 뭐 하는 곳인지 숫제 모르겠다고 잡아떼진 못하겠다.

나는 이 친절 자상한 긴 이름을 보며 옛 생각이 떠올라 실소를 금치 못한다. 1970년대 말, 지금의 한국언론학회를 한국신문학회라 일컫던 시절 학회 살림을 맡은 일이 있다. 어려운 학회재정문제의 타개책으로 현업의 신문사 방송사를 가입시키는 단체회원제를 신설했다. 그 당시 방송협회장을 겸하던 모 방송사 사장이 매우 고마운 제안을 해 왔다. 학회 이름을 ‘신문방송학회’로 갈면 학회 재정의 대부분을 방송협회서 대주겠다는 제안이었다.

학회 명칭 개정은 총회의 의결사항이라 학회장 혼자서 결정할 수 없다. 그보다도 방송이 주는 돈 보따리가 크다 해서 신문방송학회로 개명한다면 누가 아느냐, 이 다음 출판협회에서 큰 보따리를 들고 오고 또 그 다음엔 영화협회서 큰 보따리를 들고 온다면 학회 이름을 한국신문방송출판영화협회로 고쳐야 된다는 말이냐, 그건 좀 곤란하다며 나는 난색을 표했다. 다행히 그 후 총회에선 학회 이름을 돈과 바꾸지 않기로 의결을 해줘 이름을 길고 자상하게 주워섬기는 명칭 변경은 하지 않게 됐다.

‘문화 체육 관광 부’는 완전하고 안전한 이름인가. 차라리 문화부라 하면 문화란 말이 요즈음에는 시위 문화, 화장실 문화, 전직 대통령 문화 등 모든 것을 보듬을 수 있어 더 완전하고 안전한 이름은 아닐지….

이름이 맞지 않으면 물론 안 좋다. 그렇대서 이름이 너무 잘 맞아 길어져도 우습다. 더욱이 이름이 자주 바뀌면 이름 구실을 못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약한 것은 이름이 실속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다.

北‘주체’ ‘민주주의’는 거짓

일본의 저명한 역사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생전에 북한 학자와 논쟁을 하면서 내뱉은 말이 생각난다. 도대체 북한에선 언필칭(言必稱) 주체, 주체라고 떠드는데 북한의 국호부터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란 단어가 모조리 서양어의 일본어 번역이지 주체적인 번역어가 한마디나 있느냐, 일제 잔재가 싫으면 리퍼블릭(republic)을 중국이나 한국처럼 ‘민국’이라 할 것이지 왜 일제 잔재를 주워 쓰느냐는 얘기다.

번역어를 어느 나라 흉내를 내느냐 하는 따위보다 더더욱 중요한 문제도 있다. 민주주의는 압살해 버리고 인민은 굶겨 죽이고 권력은 세습하는 정치체제에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란 이름을 얹고, 그 이름에 많은 젊은이가 현혹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름을 듣는 것은 얼굴을 보는 것만 못하다(聞名不如見面).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