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11월 1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시저스팰리스호텔에 마련된 특설 링.
도전자인 한국의 김득구와 챔피언 레이 맨시니(미국)의 세계복싱협회(WBA) 라이트급 타이틀전이 열렸다.
두 선수는 첫 라운드부터 격렬하게 펀치를 주고받으며 혈투를 벌였다. 총 15회로 진행되는 이 경기에서 맨시니는 한때 KO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으나 14회 시작종이 울린 지 19초경 맨시니의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김득구의 턱을 강타했다.
김득구는 다운당한 뒤 주심이 카운트 10을 헤아릴 무렵 휘청거리며 일어섰으나 다시 링 바닥에 쓰러진 후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김득구는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나흘간의 뇌사 상태 끝에 어머니의 동의를 얻어 산소마스크를 떼어 내고 심장과 신장을 2명의 동양계 미국인에게 기증한 후 관에 실려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사건은 많은 충격을 낳았다. 김득구 선수의 어머니는 이후 자살했으며, 촉망받는 권투 선수였던 맨시니도 곧 복싱을 그만뒀다. 이 외에도 김득구 선수가 쓰러지는 장면이 TV에 생생히 중계되면서 국내에서 인기 스포츠로 각광받던 복싱이 ‘위험한 스포츠’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해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1897년 월터 크루트가 복싱경기 도중 사망한 이후 김득구 선수가 사망할 때까지 총 340여 명의 복싱선수가 사망하거나 식물인간이 됐다.
김득구 선수의 사망으로 세계 복싱계에도 거센 논쟁이 일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언론에서는 복싱의 잔혹성을 집중적으로 지적했고 미국 하원에서는 이 문제로 인해 청문회까지 열렸다.
결국 세계권투협회를 비롯한 국제 권투기구들은 15회 경기를 12회로 줄이고, 스탠딩다운제를 도입하는 등 선수를 보호하기 위한 대책들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런 ‘안전대책’에도 불구하고 ‘김득구의 비극’은 재현됐다.
2007년 12월 25일 세계복싱기구(WBO) 플라이급 인터콘티넨털 타이틀 매치를 마친 뒤 의식을 잃고 쓰려졌던 최요삼 선수가 뇌사 판정을 받고 결국 해를 넘긴 2008년 3일 0시 1분 가족의 동의하에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최요삼 선수는 한국 선수로는 5번째 ‘링 사망자’로 기록되게 됐다.
안영식 기자 ysahn@donga.com
▲영상취재: 정영준 동아닷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