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는 불교서 주는 불교 되자”
폐사를 ‘1만 신도 안식처’로
《한국의 대표적 오지인 경북 봉화군 청량산(해발 870m) 깊숙한 곳에 ‘미소년’처럼 숨어 있는 청량사(淸凉寺). 신라 문무왕 3년(663년)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이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폐사나 다름없었던 이 절이 한국 불교계의 대표적 문화 사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84년 이 절에 홀로 부임한 주지 지현 스님의 원력(願力) 덕분이다.》
지난 주말, 절 입구 주차장에서 내려 40∼50분 가파른 경사로를 걸어 올라가자 한순간 시야가 탁 트이며 빼어난 풍광 속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도량이 나타났다. 문수 반야 의상 보살 연화 금탑봉 등 기암괴석이 연꽃처럼 둘러쳐진 사이로 자리 잡고 있는 도량을 마주하는 순간 왜 청량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는지 실감난다. 그야말로 ‘맑고 시원하다’. 절정이 지나긴 했지만 노릇노릇, 울긋불긋, 푸릇푸릇 단풍과 침엽수가 자태를 뽐내고 있다.
주지 스님과 차 한 잔을 나누며 대화를 시작했다. 스님이 창 앞에 만들어 놓은 ‘새 공양간’에는 떡 사과 등이 놓여 있고 산까치 제비박새 방울새 등이 수시로 날아들어 ‘공양’을 하고 간다. 건너 골에 사는 멧돼지 가족들이 한밤중은 물론, 대낮에도 법당 옆 샘터로 찾아와 물을 마시고 가곤 한다.
“처음 부임했을 때는 서너 시간 산속을 걸어 들어왔지요. 폐사가 되다시피 한 법당인 유리보전(琉璃寶殿)을 보고 기가 막혔습니다. 사월 초파일 연등도 23개에 불과할 정도였습니다. 창건 당시 33개의 부속건물을 갖추었던 대사찰로, 봉우리마다 자리 잡은 암자에서 스님들의 독경 소리가 청량산을 가득 메웠다고 전해지는데….”
청량사의 쇠락은 조선시대 불교 억압 정책 때문. 특히 풍기군수 주세붕은 보살봉을 자소봉, 의상봉을 장인봉으로 고치도록 했을 정도다. 하지만 대유학자 퇴계 이황은 수시로 청량산에 올라 “독서는 유산(游山)이고, 유산은 독서”라고 가르쳤고, 청량산을 소재로 55편의 시를 지을 정도로 청량산을 아꼈다. 이후 전국의 유생들이 순례 코스처럼 청량산을 다녀갔다.
지현 스님은 지게로 손수 돌을 지어 나르는 등 3차례에 걸쳐 20년간 불사를 하면서 도량을 정비했다. 인근 낙동강에서 불어오는 거센 골바람이 휘몰아칠 때면 법당과 종각의 기왓장이 다 날아가는 등 갖은 악조건 속에서도 도량은 ‘아름다운 산사’로 차츰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포교의 중심축을 ‘받는 불교에서 주는 불교’로 전환해 2001년부터 매년 9월 산사음악회를 개최하자 관객이 구름처럼 밀려들었고, 시 낭송회를 여는 등 문화 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장사익, 안치환, 신효범, 오정해 씨 등이 ‘노래 공양’을 마다하지 않았다. 신도 수가 3500가구 1만여 명으로 늘어났고, 등산객을 포함해 연평균 25만여 명의 참배객이 찾아온다. 특히 올 5월 선학봉과 자란봉을 잇는 국내에서 가장 긴 산악 현수교량인 ‘하늘다리’(지상에서의 높이 70m, 길이 90m, 폭 1.2m) 개통을 계기로 관람객 수가 50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모든 것이 부처님의 가피(加被)지요. 돌 하나, 나무 한 그루에도 저의 불심이 녹아 있습니다.”
스님은 청량사의 5경(景)으로 ‘아침 운무’ ‘매월 보름 뜨는 보름달’ ‘봄 햇살에 비치는 연초록 나뭇잎’ ‘가을 밤 눈부시게 쏟아지는 별’ ‘겨울 눈(雪)에 비치는 달빛’을 꼽는다. 특히 “조용하고, 쓸쓸하면서,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을 사무치게 사랑한다”고 한다. 스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곧 시(詩)요, 법문(法門)처럼 들린다. 청량산 늦가을 바람 속에, 겨울이 오고 있다.
봉화=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