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제네바의 나시옹 지구에는 수많은 국제기구들이 모여 있다. 이 나시옹 지구의 한복판에는 ‘유엔 유럽본부’가 있다. 만국기가 두 줄로 도열해 펄럭이는 유엔 유럽본부 정문 앞 건너편에는 걸리버여행기의 거인국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높이 12m의 거대한 나무의자 하나가 서있다. 4개의 다리 중 왼쪽 앞다리가 부러져 있는 이 의자는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은 사람의 육신을 상징한다.
지뢰 반대 운동을 펴온 비정부기구(NGO)인 ‘핸디캡 인터내셔널’이 1997년 8월 18일 세운 ‘브로큰 체어’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제대로 제거되지 않아 수십 년에 걸쳐 민간인 피해를 양산하는 대인지뢰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핸디캡 인터내셔널은 이중의 언어 상징 장치도 갖춰놓았다. ‘chair’는 프랑스어로 ‘셰르’라고 읽으며 ‘육체(flesh)’를 뜻한다.
브로큰 체어는 비운의 영국 왕세자비였던 다이애나 스펜서의 향기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뢰 반대 운동에 앞장섰던 다이애나가 이 의자가 세워진 지 보름이 채 되지 않아 불의의 교통사고로 운명했을 때 수많은 제네바 시민들은 줄을 지어 이곳에 추모의 꽃을 바쳤다. 다이애나는 1997년 1월 대인지뢰로 7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됐던 앙골라를 찾아 지뢰 매설 지역을 직접 걸었고, 이를 계기로 지뢰 문제는 세계의 이목을 끌게 됐다. 당시 다리를 잃은 어린이 희생자들과 찍은 사진 속에서 다이애나는 곧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꾹 참고 있는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였다.
반(反)지뢰운동은 1997년 12월 캐나다 오타와에서 체결된 대인지뢰금지협약으로 결실을 맺었고, 이를 주도한 국제NGO인 ‘국제지뢰금지운동(ICBL)’은 그해에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현재 오타와 협약에는 158개국이 서명했고,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 등 37개국은 미서명국가다. 그렇다면 한국은? 아직 협약에 서명하지 않았고, 북한도 마찬가지다.
비무장지대(DMZ)에 100만 개가 넘는 대인지뢰가 촘촘히 박혀 있는 휴전 상태의 한반도에서 협약 서명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 있다.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어 닥칠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지뢰 제거 문제가 심각한 현실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10∼14일 휴전 이후 처음으로 DMZ 내에서 생태계 조사를 벌인 민관합동조사단은 무장한 병사들의 엄호를 받으며 군복을 입고 조사활동을 벌였다. 곳곳에 매설된 지뢰의 위험 때문에 평상시 수색조가 다니는 좁다란 길만 다니며 제한적인 지역만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조사의 한계에도 DMZ에는 광활한 자연습지가 생겨나고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50여 년간 지속돼 온 군사적 대치 속에서 역설적으로 두루미를 비롯한 희귀 동식물들은 미답의 평화를 누리며 생명을 온존해온 것이다.
DMZ의 철조망이 걷히는 날이 언제가 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몇 남지 않은 세계적인 자연 생태계의 보고(寶庫)로 그 위용을 드러내는 데에 최대 난제는 지뢰 제거 문제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풀어 나갈 한국의 다이애나는 먼 곳에 있지 않다. 두루미와 어름치, 말똥가리, 묵납자루들이야말로 DMZ의 평화와 생태계를 지켜나갈 안전장치들이다.
김정훈 사회부 차장 jng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