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동(38)이 진행하는 한 TV프로그램의 게스트로 이만기(45)가 나온 적이 있었다. 둘은 최고인기를 구가하던 민속씨름시절을 회상하더니, 이내 고수들만이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강호동이 “몸을 부대끼는 순간, 마치 샅바를 타고 데이터가 전달되듯 상대의 수가 머리 속에 입력된다”고 하자 이만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펜싱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들어본 적은 있었다. 소위 블레이드 센스. 상대와 칼을 부딪치는 순간, 상대의 이후 동작들이 한 눈에 펼쳐 보인다는 최고의 경지다. 씨름에서는 어떻게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일까. 수원시청 씨름단(감독 고형근)을 찾았다.
○목마 태우고 산타기
17일 오전9시40분, 수원 팔달산. 공포의 산타기로 선수들의 하루가 시작된다. “쉽지 않을 텐데요.” 청룡급(105kg 이상) 이충엽(31)의 한마디. ‘산비탈 계단 오르내리기 정도야 못하랴’하는 순간,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선수들이 100kg에 육박하는 동료를 목마 태우더니 계단을 올랐다. 하체근력을 강화하고, 몸의 균형을 잡는 훈련.
“제가 요즘 목 디스크가 있어서요.” 핑계 같지 않은 핑계를 댄 후, 그냥 열심히 뛰어서 오르내리기로 했다. 왕복 5회 이후부터는 업고 뛰는 선수들이 더 빠르다. 둘이 합쳐 200kg가 넘는 큰 몸집들이 산을 타는 모습. 한여름이면 그 옆에 생기는 그늘만으로도 시원할 정도다.
약수터로 산책 나온 주민들에게도 이것은 큰 구경거리다. 2008추석장사(청룡급) 윤정수(23·170kg)는 “처음에는 우리를 보고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이셨는데 요즘은 (씨름선수임을) 알아보고, 많이 격려해 주신다”고 했다. 물론 지금까지도 말을 못 붙이는 주민들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잘 먹어야 힘 쓴다
쌀쌀한 날씨에도 땀방울은 송골송골. 어느덧 시계는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식을 잘 하기로 유명하다는 한 식당을 찾았다. 이 반찬, 저 반찬 더 달라고 하는 통에 식당아주머니의 손은 쉼 없이 움직였다.
씨름선수들이 잘 먹는 것은 사실이지만, 상상 이상으로 많이 먹지는 않는다. 청룡급 선수들은 밥 두 공기. 거상급(90kg이하)이나 백마급(80kg이하)은 한 공기 반이면 족하다. 하지만 거상급 이장일(26)은 “제대로 먹으면 정말 많이 먹는다”고 했다. 윤정수의 경우는 삼겹살 5인분에 밥 2공기도 순식간에 뚝딱. 주량도 소주 7병에 이른다.
○씨름의 시작은 샅바싸움
식사 이후 휴식. 선수들 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홍삼엑기스와 포도즙 등 보양식으로 원기를 충전했다. 오후 2시반부터 본격적인 기술훈련. 우선, 모래판 왕복달리기로 땀을 낸다. 씨름선수가 둔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 거상급 이용호(24)는 “100m를 12초대 초반에 뛴다”고 했다. 웬만한 선수들이 13초대. 150kg 이상의 선수들도 14초대에는 들어온다.
기본자세를 배우는 것이 첫걸음. 십자가를 그려 1사분면에 오른발을, 3사분면에 왼발을 가져간다. 오른발에 체중의 70%를 싣고, 엉덩이를 낮춰 안정된 자세를 잡으면 준비 끝. 백마급 박현욱(23)은 “씨름은 엉덩이가 큰 사람이 유리하다”고 했다. 몸의 중심이 낮아 잘 쓰러지지 않기 때문. 일단, 체형은 합격이다.
씨름은 샅바 잡는 것부터 시작된다. 샅바는 손으로만 잡는 것이 아니라, 팔로도 감아야 힘을 더 쓸 수 있다. “과도한 샅바싸움은 비신사적”이라는 말도 있지만 선수들의 생각은 달랐다. 더 깊숙하게 잡는 것도 힘 대결에서 이겨야 가능하다. 그래서 백마급 한승민은 “샅바를 잡는 순간, 내가 이길지 질지 대충 감이 온다”고 했다.
○‘숏(Short)다리’의 생존전략, 손기술
첫 번째는 다리기술. 씨름은 상대의 상체를 제압해야 이긴다. 다리를 걸더라도 상체를 누르지 못하면 되치기 당하기 십상. 밭다리와 안다리를 가르치던 도중, 한승민이 “도저히 안되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리가 너무 짧아 기술이 제대로 걸리지 않았다. 보통 키가 크면 다리기술과 들배지기 등이 더 용이하다. 하지만 낙담할 필요는 없었다. 10월, 영동장사에 올랐던 한승민의 신장 역시 172cm. 키가 작은 선수들도 언제든 이길 수 있다. 열쇠는 손기술이다.
팽팽하게 힘겨루기를 하던 도중 갑자기 한승민이 맞대고 있던 어깨를 떨어뜨렸다. ‘아차.’ 몸의 중심이 앞으로 쏠리는 순간, 한승민이 앞무릎을 당기며 밀었다. 1초도 안되는 시간 만에 모래판에 고꾸라졌다. 앞무릎치기였다. 이번에는 오금당기기 하나로 거상급을 평정한 이주용의 특별교습. 상대중심이 오른 무릎 쪽으로 쏠려 있는 순간, 오금(무릎 뒤)을 다리샅바와 함께 잡아챈다. 중심이 흔들린 상대를 상체로 밀어버리면 한판이다. 때로는 상대 왼다리를 손으로 쳐 그 쪽으로 힘이 쏠리는 순간, 오른 다리를 공략하기도 한다.
○섬세해야 거구를 쓰러뜨린다
“제가 오른쪽 어깨에 힘을 줄 테니 앞무릎치기 한 번 해보세요.” 한승민이 시범상대로 나섰다. 일부러 중심을 주는 게 느껴졌다. 어깨를 떨어뜨렸더니 한승민이 앞쪽으로 휘청. 오른쪽 무릎을 치며, 몸 안쪽으로 파고들어 머리로 상대 허리를 밀었더니 한 판. “샅바를 잡으면 상대를 읽을 수 있다”는 얘기는 결국 ‘상대의 중심이 어디로 쏠리는 지’를 파악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섣불리 상대움직임을 예상했다가 큰 코를 다치기도 한다. 낚시를 좋아하는 윤정수는 “씨름에서도 고기를 잡기 위해 미끼를 던진다”고 했다. 그래서 박현욱은 “씨름선수는 잔머리에 능하고, 세심한 면이 있다”고 했다.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 여자가 되고 싶은 소년이 용기를 얻은 곳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남성적인 공간이라는 씨름부였다. 그것이 극적효과를 위한 설정만은 아니었다. 씨름은 우락부락한 살점이 아니라, 섬세함으로 무장한 스포츠다. 관계에서 사람을 읽어야 성공하듯, 살을 맞댄 상대를 읽어야 씨름도 이길 수 있다. 그래서 수원시청 씨름단은 “씨름선수가 큰 몸집만큼이나 이해심도 넓다”고 입을 모았다.
수원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사진 | 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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