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카소의 맛있는 식탁/에르민 에르셰 지음/예담
《“작품 ‘성게를 먹는 사람’은 날것 그대로의 음식에 탐닉하는 식도락가의 이미지로 덮여버렸다. 생명은 가장 강렬하고도 원초적인 표현으로 그 이미지에 깃들었다. 딱딱한 자세를 취한 채 굳어 있던 군인의 모습은 햇살과 맛있는 성게를 한껏 즐기는 뱃사람의 모습으로 대체되었다. 성게는 피카소가 가장 즐겨 먹던 것 중 하나였다.”》
음식에서 영감 얻은 피카소
‘피카소의 맛있는 식탁’은 이처럼 음식과 예술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살펴본 책이다. 프랑스 잡지 ‘뉴스매거진’ 등에서 일하는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특히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에게 초점을 맞췄다. 그의 생애와 작품을 통해 음식물 섭취라는 인간(혹은 동물)의 가장 원초적인 행위와 예술의 상관성을 파헤친다.
책에 따르면 음식과 예술의 관계를 살피는 데 피카소만 한 인물이 없다. 그에게 음식은 “여자와 똑같은 탐미의 대상”(유경희 미술평론가)이었다. 평생 여성을 탐닉한 피카소는 이성을 만날 때 세상에 오로지 그 여성만 존재하는 듯 집중적이고 공격적으로 사랑했다. 이런 태도는 음식에도 마찬가지였다. 송아지 머리 고기를 먹다가 배 속에 들어간 송아지 머리가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골몰하며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려 했다고 한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피카소가 나고 자란 에스파냐(스페인) 시기를 다룬 ‘축제의 맛’, 그의 예술혼이 꽃핀 프랑스 파리 생활에 초점을 맞춘 ‘예술의 맛’,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머문 프랑스 남부 해안 미디 지방 시절을 다룬 ‘인생의 맛’. 지역마다 독특한 향취를 지닌 요리와 음식문화는 피카소의 작품활동에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예를 들어 어머니 성을 따라 ‘피카소’로 서명하기 시작한 1906년 여름을 보자. 당시까지만 해도 그는 정물화를 경원시했다. 하지만 당시 머물던 피레네 산맥 지역의 식탁에 흔히 오르던 ‘포론’(뾰족한 주둥이의 항아리)을 좋아했던 피카소는 이를 그리며 진지하게 정물화에 빠져든다. 화가의 예술이 뿌리내린 두 고향, 스페인과 프랑스를 상징한다는 1906년 작품 ‘항아리가 있는 정물’은 이렇게 탄생했다.
“에스파냐의 자연스러운 소산으로 탄생한 입체파”(미국 평론가 거트루드 스타인)의 효시라 할 만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빵이 있는 정물’(1909년 완성)을 보자. 이 작품의 주요 색채인 초록색과 금빛, 황갈색은 피카소가 즐기던 갓 구워낸 빵과 올리브 잎, 양 넓적다리 고기의 색깔이다. “피카소의 입체파 작품 대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 유명한 옅은 초록색”의 출발도 식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피카소의 맛있는 식탁’은 20세기 현대미술의 거장을 다룬 평전이면서 그의 작품과 식도락에 주목해 색다른 관점을 전해준다. 피카소의 화폭을 수놓은 예술적 열정은 그가 심취한 음식(그리고 이성)에 대한 열망과 맞닿아 있었다. 음식은 단순한 에너지원이 아니라 궁극적 창조행위의 발현을 돕는 매개체였다. 미래에 알약으로 배를 채우는 세상이 와도 음식이 사라지지 않을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함께 실린 프랑스 음식평론가의 피카소가 즐겨먹은 음식의 요리법도 눈길을 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음식의 재발견 30선’의 하나로 소개된 ‘그림으로 본 음식의 문화사’(케네스 벤디너 지음)는 6, 7월에 연재된 ‘여행길, 배낭 속 친구가 되어 주는 책 30선’과 중복돼 ‘피카소의 맛있는 식탁’으로 대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