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만에 만난 제자와 그라운드 안팎 찰떡궁합…태극호 선두 질주 ‘원동력’
월드컵 최종예선 한국, 사우디 2-0 제압
“그라운드에서는 네가 감독이다.”
허정무 감독이 박지성(27·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대한 무한 신뢰를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허 감독은 김남일(31·빗셀 고베)이 경고 누적으로 출전하지 못한 지난달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과의 2010남아공월드컵 최종예선 2차전부터 박지성에게 주장을 맡겼다. 임시처방이었다. 하지만 효과는 놀라웠다. ‘감독’ 허정무와 ‘주장’ 박지성은 그라운드 안팎에서 찰떡궁합을 과시하며 우즈베키스탄과 UAE를 완파한데 이어 20일 사우디마저 적지에서 격파(2-0)하며 19년 사우디전 무승의 한도 풀어냈다.
○위기 타개책은 ‘주장’ 박지성
허 감독에게 올해 중반 큰 위기가 찾아왔다. 부임 후 첫 평가전이었던 칠레와 경기서 패한 후 단 한 번도 지지 않았지만 연일 졸전을 거듭했기에 언론과 팬들의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 무승부가 많다는 점을 빗대 ‘허무축구’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터닝 포인트는 박지성이 주장이 되면서부터였다. 허 감독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경험한 박지성의 여러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며 그에게 힘을 실어줬다. 박지성 역시 코칭스태프가 미처 하지 못한 일까지 꼼꼼하게 챙기고 자신을 어려워하는 후배들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거는 등 솔선수범을 보였다.
사실 허 감독과 박지성은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가진 사이다. 허 감독이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앞두고 명지대에 재학 중이던 박지성을 대표팀에 발탁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 2000년 아시안컵 4강전에서 사우디에 덜미를 잡히며 우승에 실패하고 귀국 직후 사임한 허 감독이 8년 만에 다시 만난 사우디전에서 자신의 손으로 발탁한 박지성에게 주장을 맡긴 것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사우디전에서도 박지성은 2가지 역할을 다해냈다. 주장으로서 팀워크를 다지는 것은 물론 스스로 그라운드를 부지런히 뛰며 프리미어리거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허 감독의 구상도 확실한 효과
박지성이 주장을 맡은 지난달부터 허 감독이 사령탑을 맡은 후 줄곧 구상해 오던 플랜들이 서서히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허 감독은 그 동안 대표팀을 소집할 때마다 무명 선수들을 2-3명씩 불러들여 끊임없이 기량을 점검했다. 허 감독 스스로도 “대표팀 경험이 없는 선수들을 선발한다는 게 사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반신반의했지만 이는 옳은 선택이었다. 허 감독은 사우디전을 마친 후 “K리그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선수들이 대표팀에서도 같은 기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 큰 소득이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대표팀은 정성훈(부산), 조용형(제주) 등과 같은 실력파 K리거들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또한 이청용, 기성용(이상 서울) 등 어린 선수들이 기회를 잡으면서 허 감독이 기치로 내세운 세대교체도 자연스레 이뤄졌다. 허 감독은 사우디전을 마친 후 귀국해 “이제 팀이 어느 정도 골격을 갖췄다”고 자평했다.
박지성의 주장 완장과 ▲세대교체 ▲실력파 K리거 중용이라는 허 감독의 청사진이 절묘하게 맞물려 최상의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리야드(사우디아라비아) | 윤태석 기자 sport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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