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관 선거를 막아라.’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져 있던 1979년 11월 24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중구 명동 YWCA 강당.
민주인사들이 결혼식을 가장해 모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출 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유신 철폐와 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10·26 총성’과 함께 유신독재가 종말을 고한 직후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은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國葬)이 끝났음에도 민주화 일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79년 11월 10일 최 대행은 당시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한 이후 민의를 수렴해 개헌을 하겠다는 원론적인 수준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유신 반대운동으로 감옥에 다녀온 각 대학 제적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민주청년협의회(민청)’는 10·26사태 다음 날 긴급 운영위원회를 소집했다.
이들은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문제는 집회를 어떻게 여느냐는 것이었다. 계엄하이기 때문에 일체의 대중 집회가 불가능했으므로 궁리 끝에 결혼식 형식을 빌리기로 했다.
“18년 장기독재에 결연히 저항해 온 민주회복 투쟁이 그 최종적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는 이 역사적 시점에 서서 오늘 우리는 아직도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선(先) 대통령 선출, 후(後) 개헌’이라는 기만적인 정치일정을 내걸고 유신독재의 연장을 획책하고 있는 유신잔당의 음모를 단호히 분쇄하고 민권의 승리를 확실히 보장하기 위한 전 국민적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기 위하여 여기에 모였다.”(‘통일주체국민회의 대선 저지를 위한 국민선언’에서)
그런데 대회장은 곧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백골단’이 뛰어들어 단상을 점거한 것이다.
한 달여 후인 12월 27일 계엄사는 ‘양심과 명분의 그늘 속에서 탐욕을 드러낸 정치집회’라고 이 사건을 규정하고 관련자 가운데 18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했으며 계엄군법회의는 피고인 전원에게 징역 3년 등의 중형을 선고했다.
피고인과 변호인은 비상계엄과 계엄포고령 1호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최후진술과 변론에 나섰지만 이미 ‘전두환그룹’에 장악된 군법회의는 이를 묵살했다.
안영식 기자 ysa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