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경영의 유일한 비결은 철도 경영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 각종 시책을 단행함에 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해 9월 체결된 러일강화조약(포츠머스조약)에 의해 러시아로부터 중요한 사업의 이권을 얻어냈다. 중국 둥칭(東淸)철도 가운데 다롄(大連)∼창춘(長春) 구간 운영권을 넘겨받은 것이다.
대륙 침략을 꿈꾸던 일본으로선 절대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이권이었다. 일본은 이를 청나라에 승인시키기 위해 1905년 말 ‘일청만주선후조약(日淸滿洲善後條約)’을 강제로 체결했다.
1906년 일본은 이 철도구간을 관리할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를 설립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곤 1906년 11월 26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공식 출범했다. 초대 총재는 대만총독부 민정장관인 고토 신페이(後藤新平)가 맡았다.
만철의 영업은 1907년 4월 시작됐다. 만철은 제철 및 기계 회사를 설립했으며 이를 통해 다롄 항을 건설하고 푸순(撫順) 탄광을 개발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쳐 나갔다.
또한 만주 곳곳을 연결하는 철도망을 건설해 당시 일제 철도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끌었다.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에 이르는 철도를 운영했고 다롄∼창춘 700km 구간을 시속 100km로 달리는 특급열차를 운행하기도 했다. 이 같은 고속철도망은 만주를 관리하고 침략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한때 종업원이 40여만 명에 이르렀던 만철. 그 승승장구는 일본 최고의 두뇌들로 구성된 조사연구기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토 신페이는 식민지 통치를 제대로 하기 위해선 치밀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1907년 4월 만철의 영업을 시작하면서 일본과 유럽 등지의 최고 전문가들을 영입해 만철 내에 조사부를 만들었다. 그것은 최고급 연구집단이었다.
조사부는 만주 일대의 지질 지리 환경 등 다양한 조사 연구를 진행했고 이를 간행물로 출판했다. 이 책들은 지금도 중국 동북지방, 극동시베리아 연구의 필독서로 꼽힌다. 만철이 일본의 싱크탱크로 불렸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만철의 본질은 대륙 침략이었다. 1907년부터 1945년까지 만주에 군림하며 일본의 대륙 침략을 선도했던 만철. 그 거대한 만철은 단순한 회사가 아니라 식민지를 운영하는 하나의 제국이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