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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의&joy]담양 메타세쿼이아길 걷기

입력 | 2008-11-28 02:59:00


계절의 터널 속으로… 우수수 황금비 맞으며

《방안에서 문득 꺼내본 당신의 얼굴이 젖어있다

머뭇거리던 당신의 마음이 한순간 멎는다

불빛이 죽은 먼지처럼 이글거린다

벽면을 바라보던 눈알이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며

금싸라기처럼 만개한다

내 몸과 공간 사이에 경계가 사라진다

나와 당신 사이에

나와 당신과 무관한

또 다른 인격이 형성된다

사랑이란 하나의 소실점 속에 전 생애를 태워

한꺼번에 사라지는 일

이 우주에 더 이상 밀월은 없다

사랑은 소실점이다. 기찻길은 끝까지 평행선이다. 저 멀리 합쳐져 보이는 하나의 점은 신기루일 뿐이다. 산봉우리에 걸린 달을 잡으러 가는 순간, 달은 이미 저만치 가있다. 지평선은 자꾸만 뒷걸음질 친다. 사랑은 밤하늘의 별을 따려는 아련한 몸짓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소실점 속에 전 생애를 태워 한꺼번에 사라지는’ 무망한 일일는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꾸만 사랑에 취해 달아오른다. 자신의 경계를 지운다. 몸을 태운다.

전남 담양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 화르르 홍조를 띠고 있다. 요염하다. 적갈색 바늘잎들이 우수수 싸락눈처럼 날린다. 아스팔트 바닥은 붉은 잎으로 흥건하다. 바늘잎은 참빗 빗살이다. 좌우로 촘촘하게 나란히 달려있다. 메타세쿼이아는 그 바늘잎으로 공룡시대(2억5000만 년 전∼6600만 년 전) 초식공룡들을 키웠다. 초식공룡 한 마리는 하루 500kg씩 나뭇잎을 먹어댔다. 적갈색 껍질은 위 아래로 죽죽 갈라져 부르텄다. 그 속에는 공룡들의 쿵쾅대는 발자국이 남아있다. 씩씩거리는 공룡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나무들은 2차선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서있다. 멀리서 보면 머리가 서로 맞닿아 있는 듯하다. 원추형 황금고깔모자 쓴 늘씬한 아가씨들이 양편으로 도열해 있다. 황홀하다. 모든 생명은 딱 이 정도의 거리가 필요하다. 너무 가까우면 짜증난다. 너무 멀면 그리움이 쌓인다.

전남 담양군 담양읍 남산리에서 전북 순창군 금과면 경계까지 8.5km 길. 남산리∼금월교 1.5km 길은 아예 차량통행 금지다. 영화 ‘화려한 휴가’ ‘가을로’ ‘연리지’ 그리고 드라마 ‘푸른 물고기’ 촬영지로도 낯익다.

느릿느릿 명상하며 걷는 사람, 뒷짐 진 채, 이 나무 저 나무 살펴보는 사람, 두 손 꼬옥 잡고 가는 연인들, 어린 딸의 어깨를 안고 가는 엄마, 뭔가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아버지와 아들, 2인용 자전거 타고 가는 학생들, 여기저기 셔터를 눌러대는 사진작가들…. 차가 다니지 않는 이곳만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있다.

메타세쿼이아는 마지막 빙하기(4000만 년 전∼300만 년 전)에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그 뒤 사람들은 화석으로만 그 흔적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1940년대, 살아있는 메타세쿼이아 수천 그루가 중국 양쯔 강 상류 쓰촨 성에서 발견됐다. 중국에선 ‘수삼(水杉)’이라고 부른다. 물기 많은 곳에서 잘 자라는 탓이다.

담양 메타세쿼이아 길은 박정희 정부 때인 1972∼73년 가로수 조성 시범 케이스로 심은 것. 나이가 벌써 30대 중반을 넘어 헌헌장부가 됐다. 현재 2703그루가 남아있다. 2002년, 생명의 숲 가꾸기 국민운동본부는 이 길을 ‘가장 아름다운 거리 숲’으로 뽑았다.

○ 조선 인조 때 만든 홍수방지숲 관방제림

담양엔 수백 년 묵은 ‘늙은 나무숲’도 있다. 담양천 남쪽 둑의 관방제림(官防堤林)이 그곳이다. 조선 인조 때(1648년) 관에서 홍수방지용 둑을 쌓고 거기에 숲을 만들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제방은 모두 6km. 이 중 200∼400년 나무숲은 2km에 이른다. 이 구역 전체가 천연기념물 제366호로 지정됐다. 2004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구역 안의 177그루 늙은 나무들이 하나하나 이름표를 달고 있다. 1번은 딱 한 그루밖에 없는 아름드리 엄나무. 177번은 도마 만드는 데 으뜸인 팽나무. 50%가량이 푸조나무이고, 그 다음이 느티나무, 팽나무 순이다. 벚나무, 은단풍, 개서어나무도 눈에 띈다.

푸조나무는 남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안방풍림 나무다. 느티나무처럼 우산모양의 그늘을 만들어 준다. 앵두만 한 자줏빛 까만 열매가 검버섯 점처럼 달려있다. 스님들 사리 같다. 한 알 깨물어 보니 달다. 나무껍질은 회색빛이다.

늙은 나무들은 가부좌를 틀고 동안거(冬安居) 중이다. 늙은 몸은 깡말라 뼈만 남았다. 어디 하나 바늘 꽂을 살집조차 없다. 마른기침 소리가 들린다. 우듬지에 까치집이 구조물처럼 드러나 있다. 까치들 수다 떠는 소리가 요란하다. 문득 나태주 시인이 속삭인다.

‘우리가 과연/만나기나 했던 것일까/나무에게 말을 걸어본다//서로가 사랑한다고/믿었던 때가 있었다/서로가 서로를 아주 잘/알고 있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가진 것을 모두 주어도/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바람도 없는데/보일 듯 말 듯/나무가 몸을 비튼다.’(‘나무에게 말을 걸다‘ 전문)

늙은 나무들은 수백 년 동안 묵언정진 중이다. 불립문자 언어도단(不立文字 言語道斷). 글이나 말이 필요 없다. 사람들은 몸짓으로 나무와 통한다. 모든 사람은 그 나무들 앞에서 어린아이가 된다.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저녁놀이 지면 나무는 발을 씻는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사람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무가 웃고 있다.

관방제림 둑길엔 여기저기 나무평상이 놓여있다. 한여름 노인들의 쉼터다. 아침저녁으로 어슬렁어슬렁 막내 손잡고 산책하는 길이기도 하다.

죽녹원은 대나무숲 공원이다. 5만 평 터에 분죽 왕대 맹종죽 등 각종 대나무가 빽빽이 서있다. 그 사이사이에 길이 있다. 체험마을 가는 길(1100m), 사랑이 변치 않는 길(460m), 운수 대통길(440m), 선비의 길(440m), 철학자의 길(360m), 성인산 오름길(150m), 죽마고우길(150m), 추억의 샛길(150m), 샛길(100m) 등 모두 3.35km나 된다. 천천히 걷다 보면 2시간쯤 걸린다.

대나무 숲길은 밖보다 기온이 섭씨 4∼7도가 낮다. 맑고 서늘하다. 산소가 많아 머릿속이 거울 같다. ‘쏴아! 쏴아!’ 대숲 바람 소리가 들린다. 눈이 오면 푸른 댓잎과 하얀 눈의 어우러짐이 꿈결 같다. 죽림욕은 삼림욕보다 더욱 유쾌 상쾌하다.

○ 죽녹원∼관방제림∼메타세쿼이아 길 10여km

담양 걷기여행은 죽녹원부터 시작하면 된다. 부근 전남도립대와 향교다리 옆에 무료주차장이 있다. 푸른 대숲 속을 거닐다가 향교다리를 건너면 바로 관방제림 둑길이다. 1번 엄나무 2번 푸조나무에서부터 176번 느티나무 177번 팽나무까지 다 본 뒤, 계속 가다보면 자연스럽게 메타세쿼이아 길이 나온다.

어슬렁어슬렁 게으름 피우며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댓잎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죽림욕을 먼저 한 뒤, 관방제림의 늙은 나무 숲길을 걷는다. 옷을 다 벗어버려 더 자유스러운 나무 성자들. 그들이 속삭이는 침묵의 소리. 그 길이 끝나면 화사한 메타세쿼이아의 열병식 길로 이어진다. ‘살아있는 화석’ 메타세쿼이아. 그 나무터널을 걷다 보면 ‘사람 한세상 산다는 게 참 뜬구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들은 말한다. “제발, 아등바등 살지 마라”고.

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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