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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한기흥]국회의원이 ‘비정규직’이라면

입력 | 2008-12-05 03:00:00


전직 국회의원인 A 씨는 스스로를 ‘비정규직’이라고 부른다. 16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 17대와 18대 총선에선 금배지 도전에 실패했지만 정치활동에 대한 꿈을 단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안정적이지 않다. 선거 때마다 당선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A 씨의 말에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데 대한 정치인들의 불안이 엿보인다. 사실 국회의원은 어느 면에선 비정규직인 기간제 근무자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임기 4년은 고용주인 유권자와의 계약기간에 해당하고, 이를 연장할 것인지 여부는 전적으로 유권자 마음에 달렸다. 선거 때 “제발 국회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모습이 딱해서 표를 찍어주는 유권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회의원들이 경제위기로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내몰리는 진짜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처지를 얼마나 근심하고 있을까.

이영희 노동부 장관은 지난달 27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에서 “내년 7월에 비정규직 계약기간 2년 시한이 도래하는 기간제 근로자가 108만 명인데 그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는 한 법에 의해 더는 채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기국회에서 비정규직 보호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2007년 7월 비정규직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계약기간을 2년으로 정한 비정규직보호법이 오히려 대량 해고 사태를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는 법 제정 때부터 있어 왔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실물경제 침체로 숨 가쁘게 확산되는 지금 그 같은 우려는 현실화할 가능성이 크다. 비상경영에 들어간 기업들이 계약기간을 채운 비정규직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느니 해고하려 할 것이라는 건 뻔한 일이다.

정부와 여당은 이를 우려해 계약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는 쪽으로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의 움직임은 굼뜨다. 한나라당은 야당 등의 반발을 우려해 개정안을 아직 제출하지 않았고, 민주노동당은 정부여당이 개정안을 내놓으면 대응입법에 나서겠다는 태도다. 민주당만 파견근로자를 2년 이상 사용할 경우 고용한 것으로 간주하는 내용 등을 담은 개정안을 제출했다. 야당은 계약기간 연장이 대량 해고 사태를 미루는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현실적으로 비정규직 문제의 본질적인 해법을 찾기란 쉽지 않은 실정이다. 그나마 이 문제는 새해 예산안 등을 놓고 파행을 거듭하는 난장판 국회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해고대란이 예고되는데도 정치권이 손을 놓고 있는 건 용납하기 어려운 직무유기다. 그런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만일 게으른 국회 때문에 사회적 약자들이 경제위기의 희생자가 된다면 정치인들은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수당과 상여금을 포함해 연간 1억1303만6800원의 세비를 받는다. 여기에 차량유지비, 통신요금 등 활동지원비를 포함할 경우 연간 1억9435만200원을 국민의 세금으로 받는다. 구성원 모두가 약 2억 원의 연봉을 받는 조직은 국회 말고 또 찾기 어렵다.

할 수 있다면 세비만 축내고 일은 안 하는 국회의원들부터 구조조정을 하고 싶다는 게 솔직한 민심이다. 정치인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다음 총선 이후엔 그 자신이 비정규직 정치인이 될지도 모른다.

한기흥 정치부장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