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만에 만난 아들이
‘아저씨’라 하더라고요
후회가 밀려 들었어요”
사각의 링은 천하장사에게 비정했다. 숨쉴 틈을 주지 않았다. 상대 선수의 주먹과 발이 무차별 날아들었다. 눈 주위는 부어올랐고 코피가 쏟아졌다.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무너져 내린 자신을 보았다.
‘씨름판의 황태자’ 이태현(32)은 6월 15일 그렇게 쓰러졌다. 일본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열린 종합격투기 프라이드 FC 드림4 미들급 그랑프리 2라운드에서 알리스타이르 오베레임(네덜란드)에게 1라운드 36초 만에 KO패.
2006년 7월 프라이드 FC에 진출한 그의 성적표는 1승 2패가 전부다.
그런 이태현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2년 5개월 만에 다시 샅바를 잡았다.
이태현은 2일 경북 구미시 형곡동 동아헬스클럽에서 내년 1월 설날 장사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몸만들기에 한창이었다.
○ 외로웠던 종합격투기 생활
이태현은 종합격투기를 포기한 것에 대해 “후련하면서 아쉽다”고 말했다.
“씨름 팬을 실망시켜서 죄송하죠. 성공해서 돌아오려 했는데….”
경기 외적으로도 힘들었다. 자비로 숙식을 해결했다. 편의점 도시락으로 배를 채울 때가 많았다. 먹여 주고 재워 주는 씨름판과는 정반대였다.
일본에서는 아는 스님의 배려로 절에서 생활했지만 지난해 3월 러시아 전지훈련을 할 때는 누우면 움직일 공간이 없는 쪽방에서 살았다. 그는 외로웠다.
“휴가 때 귀국해 네 살 된 아들 승준이를 만났는데 ‘아저씨’라고 부르더군요. 마음이 아팠죠. 내 욕심만 채우려 한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생기더군요.”
그러던 중 이태현은 김종화 구미시청 감독을 만났다. 그가 구미초교 4학년 때 씨름을 가르쳐 준 스승은 “다시 시작해 보자”고 권했다. 가족도 “피 흘리는 모습은 못 보겠다”고 했다. 그가 종합격투기를 접기로 결심한 이유다.
구미시는 이태현을 시 체육회 소속으로 계약금과 연봉을 합쳐 1억 원에 영입하기로 결정했다.
○ 백두장사 최다 우승에 도전
이태현은 매일 오전 2시간씩 헬스클럽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있다. 130kg인 몸무게를 전성기 시절인 138kg 수준으로 늘릴 계획이다. 150kg이 넘는 무제한급 선수들과 상대하려면 힘을 쓸 수 있는 몸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후에는 모교인 구미초교에서 구미시청 선수들과 함께 몸을 풀고 연습경기를 한다.
이태현은 훈련 첫날인 1일 몸무게 160kg의 손명호 선수와의 연습경기에서 10번 가운데 7번을 이겼다.
김 감독은 “태현이는 기본기가 탄탄해 내년 설날 대회에서 8강 진출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태현은 1993년부터 2006년까지 천하장사 3회, 백두장사를 18회 우승했다. 그의 목표는 이만기(인제대 교수)와 공동 선두인 백두장사 우승 최다 기록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는 2006년 용인대 대학원에서 체육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선수에서 은퇴하면 지도자나 교수로 후배를 양성할 계획이다.
이태현은 힘이 될 때까지 선수 생활을 하되 한계에 부딪히면 미련 없이 샅바를 벗겠다고 했다. “씨름 팬에게 좋은 경기로 보답하는 게 제 몫이라고 생각해요. 침체된 씨름을 활성화하는 데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구미=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 영상취재 : 동아일보 황태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