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책갈피 속의 오늘]1961년 청계천 도심 복개공사 준공

입력 | 2008-12-05 03:00:00


청계천을 복개하자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1926년 일제는 “청계천을 덮어 1만 평의 주택지를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1935년엔 청계천 고가철도 건설 계획을, 이듬해인 1936년엔 청계천 운하 건설 계획을 잇달아 발표하기도 했다.

일제는 1937년 정말로 복개공사에 들어가 1942년 태평로에서 광통교(광교)까지의 청계천을 덮어버렸다.

광복 후에도 청계천 복개에 대한 관심은 그치지 않았다. 1955년 광통교 상류 부분 138m를 복개하더니 1958년 5월엔 청계천의 본격적인 복개공사에 착수했다.

광통교에서 오간수교까지 청계천 도심구간(2.35km)의 복개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 공사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이제 정말로 청계천이 사라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3년 7개월의 공사 끝에 1961년 12월 5일 청계천 도심구간 복개공사가 마무리됐다. 천변의 판자촌이 사라지고 도로는 깨끗해졌지만 청계천의 추억과 역사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가장 아쉬운 점 가운데 하나는 아름답고 정겨운 돌다리들이 없어진 것이다.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그의 계모(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 씨 사이의 갈등이 담겨 있는 광통교는 1958년 복개 도로 밑에 묻혔다. 난간이 단정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수표교는 1959년 중구 장충동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 1926년 6월 순종황제의 국장 행렬이 지나갔던 애환의 오간수문과 오간수교도 1961년 그대로 철거됐다.

도심구간 복개 이후 1966년부터 하류 구간 복개공사에 들어가 1977년 청계천은 완전 복개됐다. 그 위로 청계고가가 세워지고 차량들이 질주하기 시작했고 청계천 복개도로와 고가는 근대화의 상징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그 청계천이 물길을 되찾기 시작한 것은 2003년. 그해 7월 복개도로와 고가를 철거하고 다시 물길을 흐르게 하는 청계복원사업이 시작됐다. 그리고 2005년 10월 완공됐다.

그 과정에서 오간수교는 복원되지 못했지만 오간수교에 서려 있는 임꺽정의 전설은 되살아났다. 옥에 갇힌 가족을 구한 뒤 오간수문의 쇠창살을 부수고 탈출했다는 전설. 2003년 복원 과정에서 발굴을 해보니 오간수교 아래 하천 바닥에서 오간수문의 쇠창살 조각이 발견된 것이다. 또한 그 옆에서 조선시대 동전 꾸러미도 함께 발굴됐다.

당시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임꺽정이 오간수문으로 몰래 도성을 드나들다 돈을 흘린 것 아닐까.”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청계천의 추억이 되살아났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일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