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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김형준]선천성 상생 결핍증인가

입력 | 2008-12-06 03:00:00


21세기를 앞두고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은 다양한 설문을 토대로 20세기 최고의 인물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미국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선정했다. 루스벨트 선정 이유는 불굴의 신념과 의지로 대공황을 극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끈 공적이 반영됐다고 보인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3년 3월 8일 첫 기자회견에서 “이 위대한 나라는 과거에 해냈던 것처럼 다시 또 한 번 해낼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일은 두려움 그 자체이다”라고 역설했다.

국회가 민생을 살리기는커녕…

루스벨트의 연설은 대공황으로 절망에 빠진 국민에게 희망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 의회가 루스벨트의 이러한 신념에 신속하게 대응했다는 사실이다. 특별 회기를 통해 뉴딜 정책의 근간이 되는 14개 법안을 여야 합의로 주저 없이 통과시켜 경제 위기 극복에 일조했다.

그렇다면 1997년의 외환위기 때보다 더 혹독한 시련을 겪는 경제위기 상황 속에서 한국 국회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 기획재정부는 최근 “국제금융시장이 실물 경제 위기로 확산되면서 수출이 큰 폭으로 감소하는 등 경제의 전반적인 위축이 조기 가시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경제상황이 이렇게 절박한데도 한국 국회는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절망과 고통만을 안겨주고 있다.

미국 의회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연일 법을 고치고, 일본은 4000개 이상의 규제를 풀기 위한 법적 조치를 검토하는데 한국 국회는 직무유기를 넘어 ‘민생 죽이기’에 ‘올인(다걸기)’하는 구태를 보이고 있다. 정부가 ‘경제 살리기’를 위해 만든 법안은 몇 달째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국회 예산안 심사가 지연되면서 정부의 경기부양 계획이 차질을 빚고 있다. 금융위기가 터진 9월 이후에는 경제 수장들이 국정감사, 상임위, 특위 등 국회 출석에 매달리면서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했다.

경제 살리기에 필수인 법안과 예산안 통과가 지연될수록 경제 살리기 대책은 늦어질 수밖에 없고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보게 된다. 특히 경기 흐름에 맞춰 적기에 재정지출이 이루어져야 경기부양 효과를 볼 수 있는데 기회를 놓치면 국민 세금을 낭비할 수 있다. 경제위기를 맞아 1분 1초를 아껴 써야 할 판에 마치 ‘선천성 상생 결핍증’에 걸린 환자처럼 여야는 연일 싸움에만 매몰되어 있다. 국회 스스로가 국민의 대표기관임을 포기하고 공멸의 독배를 마시면서 국민과 멀어져 가는 길을 부끄러움 없이 걸어가는 실정이다.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가 17대 국회 임기 말인 작년 11월에 실시한 국민의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의 5.3%만이 ‘국회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고 응답했고, 6.3%만이 ‘국회가 국민을 대표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더구나 ‘국회가 발목을 잡아 정부가 정책을 추진하기 어렵다’는 주장에 66.0%가 동의했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국회가 국민으로부터 얼마나 버림받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대로면 국회 해산론 나올판

눈을 씻고 봐도 18대 국회가 예전 국회보다 나아졌다는 점이 하나도 없다. 국민이 국회에 원하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제발 자신들이 만든 법이라도 제대로 지키면서 국회에 부여된 최소한의 기능을 수행하기를 원한다. 한나라당은 정부의 눈치만 보지 말고 야당과 함께 행정부를 견제하고, 민주당은 제자리로 돌아와 ‘반대를 위한 반대’에서 벗어나 대안 정당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국회가 이대로 가다가는 격렬한 국민 저항에 부닥치면서 국회 무용론이 아니라 국회 해산 요구까지 나올 수 있다. 국회의원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의 험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여야 모두 대화와 타협, 그리고 조정이 의회민주주의의 산소와도 같고 선천성 상생 결핍증을 치유하기 위한 유일한 처방이라는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