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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원 “공 대신 캔버스 쥐었을 뿐…내 인생은 아직도 프로”

입력 | 2008-12-10 08:29:00


82년 원년 한국시리즈 1차전의 개시공을 던진 투수는 누구였을까. 10월5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삼성-OB의 1차전. OB의 홈경기로 치러졌기 때문에 당연히 OB 투수다. 24승을 거둔 에이스 박철순? 선우대영? 박상열? 황태환? 주인공은 바로 강철원이라는 잠수함 투수였다. 그 손끝에서 사상 첫 한국시리즈가 플레이볼됐다. 그는 86년 청보에서 은퇴한 뒤 야구계에서 사라졌다. 20여 년이 훌쩍 넘은 세월. 팬들은 물론 야구인들마저 서서히 그의 이름 석자를 잊고 있다. 한국야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수소문 끝에 서울 도봉구 우이동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야구와는 전혀 무관한 화방(畵房)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야구선수에서 화방 사장님으로 변신

화방에 들어서자 붓이며, 도화지며, 물감이며 온통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도구들이 빼곡했다. 석고상도 보이고, 작업실 한쪽에는 솜씨를 부려 만든 캔버스들이 여기저기 놓여있었다.

82년 발행된 OB 팬북을 보면 그의 별명은 ‘미스 강’으로 적혀있다. 호리호리한 몸매와 예쁘장한 얼굴. 1958년생으로 이젠 오십줄로 들어섰지만 세월의 흔적 사이로도 그때의 얼굴 모습이 남아있었다. “슈퍼스타도 아니었는데 왜 저를 만나러 오세요. 저도 야구를 잊었고, 다들 저를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박)철순이 형이나 만나시지.” 수더분한 인상의 중년 아저씨는 겸연쩍은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바람잡이 선발? OB의 비밀병기!

그는 실제로 야구를 잊기 위해 은퇴하자마자 아예 야구 유니폼을 입은 사진을 다 없애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몸속에 흐르는 야구의 피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모처럼 야구 얘기가 나오자 추억들을 더듬어갔다. 원년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투수로 내정된 과정부터 들어봤다.

“철순이 형이 마지막 경기에서 번트수비를 하다 허리를 크게 다쳤어요. 당시 김성근 투수코치가 한국시리즈 1차전 하루 전날 저보고 선발로 나가라고 하시더라고요. 당시엔 선발투수 예고도 없어 오더를 교환할 때까지 저와 코칭스태프, 매니저 정도만 알고 있었죠. 구단에서도 몰랐을 걸요.”

그는 그해 시즌 개막을 앞두고 어깨통증이 생겨 전기리그를 통째로 쉬었다. 그러다 시즌 19경기를 남겨둔 시점에 합류해 8경기에 등판, 완투 3차례를 포함해 5연승 무패가도를 달렸다. 방어율은 2.18. 놀라운 성적이었다. 김성근 코치도 이 점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모두가 놀란 9이닝 3안타 역투

당시 한국시리즈 1차전 삼성 선발은 권영호. 15승투수와 5승투수의 대결. 모두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내다봤다. 일부에서는 그를 두고 ‘바람잡이 선발’로 여겼다. 그러나 강철원은 회초리 같은 유연한 몸에서 나오는 특유의 ‘지저분한 공’과 정교한 컨트롤을 앞세워 5회까지 노히트노런 행진을 벌였다. 3-0으로 앞선 6회초 함학수에게 2점홈런을 맞고, 9회 1사 2루서 배대웅에게 중월 2루타를 허용하며 3-3 동점을 내주고 말았지만 9회까지 3안타. 연장 10회부터 동기인 선우대영이 마운드를 이어받았다. 15회 3-3 무승부. 원년 정규시즌 240게임을 치르고도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던 무승부가 한국시리즈 첫판에서 기록된 것이었다. OB로서는 삼성 15승 트리오 권영호-황규봉-이선희 계투에 맞서 비겼으니 강철원 카드만큼은 성공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 석자는 팬들에게 깊이 각인됐다.

“각도 큰 커브로 카운트를 잡고, 몸쪽 역회전볼을 승부구로 삼았어요. 삼성에서 20승 투수가 나오든 아니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투수와 싸우는 게 아니라 타자와 싸우는 거니까. 컨디션이 좋았는데 무승부로 끝난 게 아쉬웠죠.”

○프로 출범 후 최다연승 주인공

이듬해인 83년 전반기에도 4연승을 달렸다. 원년을 포함해 9연승 무패. 당시 구경백 매니저(현 대한야구협회 홍보이사)는 “철순이도 패한 다음에 22연승을 기록했지만 프로야구 출범 이후 패없이 연승만 따지면 네가 신기록이다”며 축하했다. 실제로 그의 데뷔 후 연승기록은 92년 삼성 오봉옥이 13연승 무패를 기록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어깨통증이 재발했다.

“구단 지정병원에 가보니 어깨에 뼛조각이 3개가 돌아다닌다고 하더라고요. 당시엔 스포츠의학이 발달하지 않았죠. 병원에서는 ‘일반인이면 괜찮지만 투수가 수술하면 안된다’고 했어요. 숟가락을 들 수 없어 왼손으로 밥을 먹을 정도였는데 그때 투수로서 끝났죠. 지금도 X레이 찍으면 뼛조각 3개가 있어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9연승 후 2연패. 그리고 84년과 85년 3경기씩 등판하는 데 그쳤다. 86년 청보로 트레이드된 뒤 은퇴했다. 통산 9승4패 방어율 5.02.

○멋모르고 시작한 화방이 천직으로

그는 은퇴 후 지금까지 21년 간 ‘예림화방’을 운영하고 있다. 가업도 아니었고, 평소 관심있던 분야도 아니었다고 하니 일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집 근처에 우연히 이 가게가 나와 있더라고요. 이 일을 계속할 생각도 없었고, 사회생활 경험이나 쌓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죠. 그냥 붓이나 팔고 물감이나 파는 건줄 알았어요. 하다보니 사람들이 찾는 물건이 많아지고, 액자도 만들고, 캔버스도 만들고…. 첫해에 수입이 20-30% 올랐어요. 그래서 2년, 3년 하게 됐고 10년 되니까 손을 털 수가 없게된 거죠.”

그 역시 처음에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캔버스를 어떻게 짜는 줄도 모르고 덤볐다. “제 손을 보세요. 온통 굳은살이잖아요. 투수할 때보다 굳은살이 더 많이 박혔어요. 어디 배울 데도 없지. 혼자 끙끙 앓으며 캔버스 짜는 데 제대로 만들기까지 1년, 2년 걸렸어요.” 은퇴 후 21년 동안 한 분야에 매달린 그는 이제 그 방면에서 인정받는 장인이 됐다. “저야 모르지만 남들이 인정해주니 기분이 좋죠. 최근 다른 지역에 화방 하나를 더 열었어요. 먹고 살만 하죠.”

○야구나 화방이나 다 프로 아닌가요?

과거에는 야구선수 출신인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거의 없단다. 간혹 “혹시 야구선수 아니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지만 “아니다”고 시치미를 뗀다고 한다. 그는 은퇴 후 야구장에 단 한번도 가지 않았다. 한때 OB구단에서 스카우트직 제의가 왔지만 “난 야구판을 떠난 사람”이라면서 거절했다.

“선수를 가르치는 일이 어디 쉽나요. 감독이나 코치는 성적이 나쁘면 구단 눈치를 보지만 전 눈치 볼 사람도 없잖아요. 야구나 이거나 다 프로 아닌가요? 야구나 세상살이나 다 땅따먹기죠. 야구도 포지션 싸움을 하지만 사회생활도 자리를 잡기 위해 치열하게 사는 거니까. 야구할 때는 마운드가 내 땅이었지만 지금 내 땅은 바로 여기에요. 이젠 야구보다 이 일이 더 재미있어요.”

현역 시절 정교한 컨트롤을 자랑하던 그의 손에는 예리한 칼이 쥐어져 있다. 주무기였던 몸쪽 스크루볼처럼 역회전이 걸린 삶을 선택했지만, 각도 큰 커브처럼 그의 인생은 예술적인 각도를 그리며 스트라이크로 꽂혔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사진=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