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삐풀린 대학등록금과 취업난으로 인해 운동권 총학생회의 부활이 예견됐으나 올해 대학 총학생회 선거는 오히려 부정선거 논란이 뜨거웠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1985년 서울대 사회과학대 학생회장 선거 유세 장면. 급증하는 대학내 부정선거 논란의 원인으로 부실한 선거 관리가 주목을 받고 있다. 사진제공 서울대 대학신문
기성 정치권 뺨치는 막장선거? 요즘 총학생회 선거
"… 선거 부정이 벌어지는 과정은 이렇습니다. 자연대 건물에서 1번 후보 측 참관인과 2번 측 참관인이 참관을 합니다. 그런데 사범대 선관위원장이 2번 측 참관인을 꾀어 함께 식사를 하러 갑니다. 이후 대리서명과 함께 400여 표의 부정표가 만들어집니다. 부정 투표가 다 이뤄지기 전에 2번 측 참관인이 돌아오자 1번 측 참관인이 그를 붙들고 또 시간을 끕니다. 그러는 사이 부정 투표가 완성됩니다.… "(조선대 ID:백악골)
대학들의 총학생회장 선거가 끝났지만 상아탑은 현재 금권 및 부정선거 논란으로 홍역을 앓고 있다. 극심해진 경기침체와 취업난, 그리고 고액 등록금 이슈 등으로 운동권 총학생회 부활이 주목받는 시점에 오히려 예상치 못한 구태가 자라난 것이다.
2000년 이후 대학 총학생회 선거는 이념 대결에서 이미지 대결로 전환되어 왔다. 그러자 기성 정치권의 전매특허인 금권선거, 흑색선전, 외부세력 개입, 선심성 공약 남발 등의 행태가 대학사회에서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같은 행태를 감시할 수 있는 기구도 없는 상태여서 악습은 더욱 확산되고 있다.
● 더욱 치열해진 금권 선거
'USB 4GB를 여러분 두 손에', '프랭클린 플래너 무료배포', '구두굽 1000원, 앞머리 100원'…
지난달 말 서울 시내 K대학 캠퍼스에 나부꼈던 총학생회 후보들의 대표 공약이다. 이 대학 총학생회는 몇 년 전부터 'USB(휴대용 저장장치) 총학'이라는 괴상한 별칭이 따라 붙었다. 2006년 한 후보가 '512Mb USB 제공'을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됐기 때문인데, 그 이후 USB는 이 대학의 단골 선거경품으로 떠올랐다.
이를 놓고 일부 학생들 사이에서 "자유당 시절 고무신 선거와 무슨 차이가 있냐"며 "부끄러워서 대학 못 다니겠다"는 불평이 쏟아졌다. 그러나 매년 끊이지 않고 경품을 앞세운 후보가 당선돼왔기 때문에 올해는 거의 모든 후보가 선물 공세를 펼쳤다.
'다이어리'나 'PDA폰 지원' 같은 선심성 공약은 이미 대학선거 과정에서 유별난 공약으로 대접받지도 못한다.
올해 치러진 전북지역 한 대학의 선거에서는 한 후보가 실용성을 내세워 '1만 원 권 충전카드 제공' 공약을 내세우는 바람에 한바탕 홍역을 앓기도 했다. 현금성 선물을 지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더 큰 문제는 학생들의 이의제기에도 불구하고 학내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유권해석을 내리지 못한 채 어물쩍 넘기고 말았다는 것.
● 대리선거는 필수가 아닌 기본?
올해 대학가 총학생회 회장 선거의 핵심 이슈는 '운동권 부활'이나 '등록금 동결'이 아닌 '부정선거'에 가깝다. 적지 않은 대학에서 무효표와 대리투표 논란으로 선거를 12월 이후로 연기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경북대와 강원대 조선대 등 각 지역을 대표하는 대학에서 부정선거 논란이 있었고, 10여개 대학에서 투표연기나 재투표 결정이 내려졌다.
지난달 29일 실시된 경북대 총학생회장 선거 개표과정에서 불거진 대리투표 논란이 대표적이다. 한 선거인명부 서명란에 연속적으로 동일한 필체의 서명과 투표용지 여러 장이 함께 접힌 모습이 발견된 것. 이를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대학 선관위는 아예 대구시 선거관리위원회의 유권해석을 받아 가까스로 총 투표수의 7%에 달하는 708표의 무효처리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강원대에서는 일부 선거관리위원과 학생회장들이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바람에 논란이 벌어졌다. 또한 전체 유표투표의 10%가 넘는 800표 이상의 무효표가 속출해 "투표 자체가 의미 없는 것 아닌가"하는 논란도 겪었다. 이 같은 갈등이 지역 언론을 통해 외부로 알려지면서 학교 전체가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한총련 후보와 한총련 탈퇴 후보간의 대결로 관심을 집중 시킨 조선대에서는 올해 가장 극적(?)인 모습이 연출됐다. 지난달 21일 한총련 소속 기호 1번 후보가 얻은 표 중 부정의혹이 제기된 1180표가 무효 처리된 것. 이 표를 무효처리 하고 나니 투표율이 50% 아래로 하락하여 선거자체가 무효화 되고 말았다.
결국 선관위는 양 쪽 후보의 자격을 박탈하고 내년 3월 재선거를 치르게 됐다.
● "중립적인 감시기구 만들지 못하면 학생회도 붕괴"
매년 투표율이 50%를 넘기지 못해 총학생회 위기론이 불거지지만 일부 대학들에서는 오히려 선거 경쟁이 과열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에 대해 서울 K대학에 다니는 김민정(23)씨는 "총학생회장이란 자리가 과거에는 봉사와 희생이 요구되는 자리였지만, 최근에는 취업에 유리한 점은 물론 장학금도 적지 않아 도전해볼 만 하다는 인식이 퍼진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치열해진 선거를 치르려면 충분한 실탄, 즉 현금이 필수적이다. 1990년대 까지만 해도 총학생회장 선거 비용은 선배들의 모금, 장학금을 미리 끌어다 쓰는 방식으로 충당됐다. 액수에 대해서도 암묵적인 상한선이 존재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선거운동원 모집, 선거 팸플릿 제작 단계에서부터 무리한 투자가 나타나고 있다. 이를 위해서 유력 후보는 외부 단체와 '불순한 거래'를 시도하기도 한다.
실제 지난 수년간 일부 대학 총학생회는 행사 협찬, 자판기 운영수입, 각종 학원들의 홍보 연계, 졸업앨범 수주 등의 이권사업으로 수사선상에 오르내린바 있다.
게다가 지난해 부산대에서는 뉴라이트 계열의 외부 단체가 한 후보에게 수천만 원대의 선거 비용을 지원했다는 논란으로 홍역을 앓았다.
부정투표 논란이나 의심쩍은 선거비 논란은 모두 대학 내의 감시기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탓이다.
총학생회 구성을 위한 선거관리위원회는 대개 전임 총학생회 간부들이 도맡는다. 그러나 1년 임기의 총학생회는 학생들의 무관심 속에 학생회장의 친한 친구들로 보직이 채워지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차기 선거에서도 공정한 감시자가 아니라 '친한 사람 밀어주기'에 발 벗고 나선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최근 대학 총학생회장 선거는 총학생회의 성립기준인 50% 이상의 투표율조차 제대로 얻지 못하는 실정이다. 서울대의 경우 6년 연속 50% 이하 투표율로 연장투표를 진행하는 기록을 이어갔다. 이화여대와 서강대 역시 연장 투표를 실시해 가까스로 기준을 충족시켰다. 고려대는 아예 모바일 투표를 도입하는 방법으로 투표율 부진 논란을 비켜간 케이스다. 아예 '50% 룰' 자체를 없애는 대학도 늘고 있다.
올해 역시 상당수의 대학들이 무효표와 대리투표 논란으로 홍역을 앓았다. 더군다나 학생들은 이 같은 논란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언론과 학교의 힘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희사이버대 민경배 교수는 "대학 자치활동의 꽃인 총학생회가 부정시비에 휩싸이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학교 당국이나 외부 선거관리위원회의 권위에 기대는 상황은 총학생회의 근거를 스스로 훼손하는 일"이라며 "학생 자치기구가 신뢰를 회복하려면 학생들의 적극적 참여와 감시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정호재 기자demi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