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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로비’ 김태정 전 장관 10년 만에 비화(秘話) 공개

입력 | 2008-12-10 19:19:00

김태정 전 법무부 장관.[동아일보 자료사진]


‘옷 로비 의혹 사건’으로 구속됐던 김태정 전 법무부 장관이 10년 만에 당시 비화(秘話)에 대해 입을 열었다. 자신이 다니고 있는 ‘산정현교회’의 신앙간증을 통해서다.

김 전 장관은 DJ정권 시절 법무부 장관에 임명된 지 일주일 만에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옷 로비 사건에 휘말렸고 이 때문에 보름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나면서 구속됐다.

부하직원에 의해 구치소에 수감됐던 김 전 장관은 당시 심정을 “마치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자살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를 받고 풀려나온 김 전 장관은 변호사로 활동하며 민간법률구조재단을 설립하고 무료법률상담 등으로 어려운 서민들을 돕는 삶을 살고 있다.

지난 10월26일. ‘산정현교회’ 교단에 선 그는 호남출신으로 YS정권에서 검찰총장에 오르게 된 비화와 법무부 장관에 임명될 당시의 숨은 이야기들, 옷 로비 사건에 휘말려 구속됐던 가슴 아팠던 과거 등에 대해 숨김없이 고백했다. 때론 감정에 복받쳐 울먹이기까지 한 그의 간증고백은 1시간30분짜리 동영상으로 녹화돼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일반에 공개됐다.

김 전 장관은 “별로 자랑 거리도 아니고…, 내가 사실 옛날에 벼슬했다는 얘기는 안하려고 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대중 앞에서 처음으로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고 설명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새벽 6시까지 청와대로 와라”

1997년 그가 법무부 차관을 지내던 시절. 당시 시국이 어수선해 검찰총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차기 총장감으로 여러 사람이 거론됐고 그도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호남출신이고 당시는 YS정권 시절이었다. 당시 법무부 장관은 하루는 그를 불러 “YS정부에서 너 같은 고향(호남)을 둔 사람은 검찰총장이 되기 힘들다”며 포기하라고 말했다. 대통령과 지역색이 다른 사람이 검찰총장이 되는 것이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포기하고 있던 어느 날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내일 새벽 6시에 쥐도 새도 모르게 청와대로 와라’. 다음날 6시 극비리에 청와대에 도착해 YS앞에 섰다. 후임 검찰총장을 고민하던 YS가 몇 사람을 불러서 테스트를 하는 자리였다. 대통령 집무실에 긴 소파가 있었고 상석에 앉은 YS를 피해 자신은 맨 끝자리에 군대 이등병처럼 소위 각을 잡고 앉았다.

“대통령 앞에 가면 그 자체의 카리스마에 눌려 누구나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나는 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다 그렇다. 나는 그저 앞만 쳐다보고 앉아 있었고 하도 긴장이 돼서 제대로 대답도 못했다. 당시 YS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대통령 책상을 봤는데 까만 큰 책 같은 게 제트기처럼 ‘쏴~’하고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각하 성경책이 있네요. 성경이’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대통령 책상 위에 있던 조그만 한 성경책이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말을 쏟아내고 난 뒤 ‘아이쿠 나는 틀렸구나. 대통령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데 경솔하게 소리를 쳤으니 검찰총장은 물 건너 갔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의 말을 들은 YS는 대꾸는커녕 미동조차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검찰총장 시켜줄게 내일까진 마누라한테도 비밀로 해”

그렇게 청와대 면접을 마치고 이틀을 보낸 뒤 청와대에서 또 연락이 왔다. ‘내일 오후 3시까지 들어오라’. 그는 이때 자신이 검찰총장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같은 시간 검찰총장 퇴임식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청와대에 들어가자 YS는 대뜸 “내가 김 차관을 검찰총장 시키려고 그래”라고 말했다. 그는 너무 기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YS는 “김 차관이 내 아들 같기도 하고 동생 같기도 하다”며 덕담은 건넨 뒤 “내일 아침 내가 국무회의가 끝난 뒤 임명장을 줄테니까, 마누라한테도 얘기하지 마”라고 했다. 검찰총장은 국무회의 의결사항이라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직권으로 사전에 임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그날 밤 당시 고건 국무총리가 전화를 해 “내일 국무회의가 있는데 안건이 검찰총장 임명이야. 혹시 누가 차기 검찰총장이 되는지 아는 게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YS와의 약속 때문에 “모릅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시 생각을 하면 지금도 고건 총리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검찰총장이 된 지 한달쯤 지나 청와대를 출입하는 한 원로 목사가 검찰총장실에 들렀다. 그는 그 목사로부터 YS가 자신을 검찰총장에 임명하게 된 계기를 듣는다. “김 총장 혹시 대통령 앞에서 성경책 얘기한 적 있어?” 목사는 YS로부터 “내가 5년 가까이 집무실에 성경책을 뒀지만 그 누구도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없었는데 얼마 전에 누군가 와서 큰 소리로 성경책을 이야기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이것이 기독교 장로인 YS가 호남 출신인 그를 검찰총장으로 임명하게 된 계기다.

그는 검찰총장으로 재직하면서 ‘자녀 안심하고 학교 보내기 운동’ 등 여러 가지 정책을 내놓으며 스스로 생각하기에 열심히 일했다.

“당시는 내가 업무에 충실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점점 권력에 도취돼 가는 과정이었다. 내가 모든 사항에 대해서 다 알고 있고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술도 잘 마시고 일도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매일 술을 마시고 집에도 늦게 들어갔다. 남자가 출세를 하려면 가정을 희생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하루는 ‘아빠는 출세에 눈먼 사람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게 권력에 도취돼 갔다.”

“수감될 때는 무덤으로 들어가는 기분”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려 어느덧 임기 말이 됐고 정권도 YS에서 DJ로 바뀌었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물러날 때가 됐다고 생각한 그는 퇴임 후 쉴 계획까지 미리 세웠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DJ로부터 법무부 장관을 하라는 연락을 받는다. “DJ의 연락을 받고 퇴임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싹 사라지면서 최고의 절정에 다다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 붕 떴다.”

그러나 산이 높은 만큼 골짜기도 깊은 법. 그는 곧바로 끝 모를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

그가 법무부 장관에 취임한 뒤 일주일 만에 ‘지금도 생각하기 싫다’는 옷 로비 사건이 터졌다. 뒤를 이어 조폐공사 파업노조 사건이 터졌고 그는 장관직에 오른 지 보름 만에 물러났다. 그는 “당시는 옷 로비 사건으로 나라 전체가 미쳐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는 부인 연정희 씨와 함께 경찰, 서울지검, 대검 중수부, 청와대, 국회청문회 등 여러 곳에 불려 다니며 끝없이 조사를 받고 진술했다. 그는 “권력이라는 것이 한번 그만 두면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것을 그 당시 깨달았다”고 했다.

“도망가세요. 제가 어떻게 장관님을 구치소로 보냅니까”

결국 그는 그해 12월3일 구속됐다.

바로 어제까지 자신이 지휘했던 그 직원들에 의해 구치소에 수감된 김 전 장관은 죽고 싶을 만큼 충격이 컸다고 당시의 심경을 고백했다.

“그해 12월3일은 참 추웠다. 당시 운전하던 직원이 송치 도중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장관님 내리십시오. 차라리 도망가세요. 제가 어떻게 장관님을 구치소로 보냅니까’라며 울어 나도 같이 울었다.”

“구치소에 도착해 수감될 때는 마치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자살하고 싶었다. 자살하는 거 그거 쉬운 일이다.”

그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부분은 자녀들이었다.

“애들한테 창피하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위한테 창피해 고개를 못 들었다. 그러나 나의 결백을 확신했고 기독교 신자로서 성경에 의지해 묵묵히 수감 생활을 견뎠다. 교도관들이 ‘장관님은 어떻게 그렇게 적응을 잘하시느냐. 전에 들어와 본 적이 있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특별검사 “실패한 로비, 실체 없는 로비” 발표

특별검사는 그의 시골 외갓집과 친척들까지 모두 조사했지만 끝내 증거를 찾지 못했다.

특별검사는 결국 그의 말대로 ‘실패한 로비, 실체 없는 로비’라는 내용의 수사결과를 발표했고, 그는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은 채 무죄로 풀려났다.

그는 풀려난 뒤에도 함부로 밖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텔레비전을 통해 내 얼굴이 얼마나 많이 나갔는지 가는 곳마다 알아보더라. 사람들이 꼭 나에게 손가락질 하는 것만 같았다. 한 번은 미국에 갔는데 미국인들이 ‘혹시 당신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느냐’고 묻더라. 밖에 나가는 것이 무서웠고 숨어있는 것이 좋았다. 솔직히 지금도 그렇다.”

김 전 장관은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을 지낸 나도 검찰 수사를 받을 때 달걀로 바위를 치는 심정인데 일반 서민들은 오죽하겠느냐”면서 구치소에서 민간법률구조재단 설립을 구상하게 된다.

그는 2000년 4월 국내 최초로 민간법률회사를 설립해 현재까지 서민들을 위한 무료법률상담 활동을 하고 있다.

조창현 동아닷컴 기자 cc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