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어느 날 공자가 자로, 염유, 증점, 공서화에게 만일 세상이 너희를 알아준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제자들은 공자의 질문에 어진 정치를 펴 백성들의 삶을 돌보겠다고 포부를 늘어놓았다. 그때 증점은 비파를 타고 있었다. 공자가 증점에게도 물었다. “너는 어찌 하겠느냐?” 그때 증점은 비파의 현을 한 번 세게 울리며 연주를 끝내고 고개를 들어 말했다. “저는 봄에 새 옷을 입고 아이들과 기수에 나가 목욕을 하고 무우에 올라 바람을 쐬고 오겠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크게 감탄하며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다.”
논어 선진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나는 김완수의 시를 읽을 때마다 논어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중의 하나인 이 장면이 떠오른다. 아마도 그때 증점의 심정이 이 시와 같았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렇다. 만약 나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정말 ‘돌들이 마음 주고픈 시냇가에’ 우리는 닿을 수 있을까? 정말 우리는 ‘새들이 마음 주고픈 하늘에 닿을 수’ 있을까? ‘우리가 마음 주고픈 마음’이 우리에게는 있기는 있는 것일까? 지금 같이 복잡한 세상에 시가 이렇게 고아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서로 친한 사이에도 내밀한 얘기는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인 요즘 같은 세상에, 그것도 모르는 사람의 ‘등을 돌려 세워/오래된 일과 오래되지 않은 일을 말’하다니.
김완수의 시에는 도가적인 풍취가 곳곳에서 진하게 배어 나온다. 그에게 있어 시는 저 안빈낙도의 삶과, 지금, 여기에서의 사람과 사람의 살이를 가리키는 지도이다. 누군가 나에게 김완수 시인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어떤 사람이지?” 나는 대답했다. “감동적인 인간이지.” ‘우리들 마른 마음’을 탓하지 않고 그것을 지펴 가장 따뜻한 불을 지필 줄 아는 시인. 그 시인이 김완수다.
함성호 시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