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디해진 보이차(普이茶) 시대
《“친구들이 ‘커피’를 찾을 때 전 과감하게 ‘보이!’라고 해요.” 스타벅스, 커피빈 로고가 선명하게 찍힌 일회용 컵들. 그 사이로 풀냄새 나는 보온병이 보였다. 직장인 김희정(27·여) 씨는 친구들로부터 ‘음료 왕따’ 소리를 듣는다. 1년 전이었다. 직장 동료들과 회식 후 머리가 띵했던 김 씨는 중국 여행을 다녀온 아버지에게서 보이차(普이茶·푸얼차)를 소개받았다. 몇 잔 들이켜자 숙취가 사라졌다. 이후 콩나물국 대신 보이차 한 잔으로 해장을 하는 그는 아예 1L짜리 보온병을 들고 다니며 수시로 보이차를 마신다. ‘보이차 홍보대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마니아가 된 그는 “이번 크리스마스 때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보이차 카페에서 친구들과 송년모임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보리차? 아니죠, 보이차! 맞습니다. 양주를 연상케 하는 붉은 빛(등황색). 흙냄새로 시작해 달달한 맛으로 끝나는 매력. 중국 윈난(雲南省) 성 푸얼 시를 비롯한 서남부 지역의 대엽종 찻잎으로 만든 보이차는 중국을 대표하는 발효차 중 하나다. 발효법에 따라 생차(生茶·자연 건조), 숙차(熟茶·습성 건조)로 나뉘는 이 음료는 이제 더는 ‘메이드 인 차이나’ 꼬리표에 연연하지 않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특히 커피와 녹차, 홍차에 길들여진 젊은이들에게 어필해 새로운 마실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트렌디한 보이차 시대, 과연 그 ‘회춘’의 맛은 무엇일까?》
● 오프라인 회춘 프로젝트… 퓨전 보이차의 향연
과거 보이차는 서울 종로, 인사동 등 한옥 스타일의 민속주점에서나 맛볼 수 있었지만 최근에는 강남이나 삼청동, 홍대 앞 등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동네의 카페로 번져가고 있다. 하지만 지리적 변화가 전부는 아니다. 변화의 핵심은 메뉴에 있다. 강남구 청담동 보이차 카페 ‘보이다원’(02-545-3983)은 대만의 보이차 전문가 덩스하이(鄧時海)로부터 인증받은 것들만 취급한다고 해서 유명해진 곳이다.
여기서 가장 인기있는 메뉴 중 하나는 바로 ‘테이크 아웃’ 티백 보이차. 이는 식용 나일론 티백에 1.2g의 보이차를 넣은 것으로 뜨거운 물을 부어 간편하게 마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김인숙 보이다원 사장은 “테이크 아웃 문화에 익숙한 20대 여성 직장인들을 겨냥해 만들었는데 무용과 대학생이나 시험을 앞둔 중 고등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정통 보이차를 고집하는 기성세대와 달리 젊은이들은 ‘퓨전’ 보이차에 빠져 있다. 강남구 압구정동에 1호점을 낸 일본의 차 전문 브랜드 ‘루피시아’는 보이차에 구운 커피를 섞은 퓨전 보이차 ‘보이카페’로 인기를 얻고 있다. 루피시아 압구정 로데오점(02-511-2188)의 김서형 매니저는 “보이차 특유의 칼칼한 냄새가 부담스러운 초보자들에게 커피향을 접목시켜 거부감을 없애려 했다”고 설명했다. ‘와플 카페’로 유명한 종로구 삼청동의 와플 전문점 ‘티스토리’(02-723-8250)는 ‘와플과 곁들여 마시는 보이차’라는 주제로 두 가지의 보이차 메뉴(보이차, 보이삼차)를 판매하고 있다.
보이차의 대중화에는 보이차 음료도 한 몫 했다. 롯데칠성은 지난해 12월 ‘따스한 보이차’를 선보였다. ‘보이차 혼합추출액 99.94% 함유’라는 문구를 앞세운 이 음료는 출시 한 달 만에 3억 원의 매출을 올릴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남양유업도 최근 ‘17차’ 시리즈로 보이차를 넣은 ‘맑은 피부로 돌아갈 시간 17차’를 내놓았다.
● 온라인 회춘 프로젝트… 활발한 보이차 커뮤니티
젊어진 보이차 문화, 그 중심에는 다양한 보이차 커뮤니티가 있다. 현재 보이차 관련 인터넷 동호회는 줄잡아 30∼40개에 이른다. 20, 30대 젊은층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1300여 명의 회원이 있는 동호회 ‘보이차 구락부’의 20, 30대 회원은 676명으로 전체의 절반이나 된다. 동호회 운영자이자 서예가인 김중경(48) 씨는 “초창기만 해도 40대 이상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중고교생들도 가입할 정도로 젊은층이 대세”라고 말했다. 이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차를 소개하는 것은 물론 보이차 쇼핑 노하우, 보이차 다기(茶器) 정보 공유, ‘짝퉁’ 감별법 같은 자신만의 노하우를 공유하고 있다.
아예 정기적으로 ‘품차회’를 여는 동호회도 있다. ‘보이차는 내 친구’ 회원들은 매월 둘째주 주말에 각자 준비한 보이차를 즉석에서 끓여 마시는 ‘다모임’을 한다. 가족 단위 참가자가 많은 것이 특징. 운영자인 유승환 씨는 “초등학교 5학년, 3학년인 내 아이들도 어느덧 마니아가 됐다”고 말했다.
● 자나 깨나 차(茶) 조심?
보이차가 젊은층에 파고들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다이어트 효과 때문이다. ‘보이차는 몸에 해로운 기름기를 제거한다’는 중국 약학서적 본초강목습유(本草綱目拾遺)의 한 대목이 소개되면서 ‘S라인 음료’, ‘다이어트 차’ 등의 이미지로 여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창업동아리 학생들과 함께 보이차 쇼핑몰 ‘T&FC’를 연 김동관 전북과학대 경영계열 교수는 “보이차의 깊은 맛을 즐기기보다 새로운 차를 마신다는 문화적 우월감 때문에 커피 문화에 길들여진 젊은이들이 보이차에 눈을 돌리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또 실물경제에 눈이 밝은 일부 젊은 직장인은 보이차를 ‘재테크’의 수단으로 여기기도 한다. 유통기간이 없는 발효 식품이기 때문에 보관만 잘하면 오래될수록 그 가치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중국 윈난 성 현지에 직접 가 보이차를 ‘사재기’하는 20, 30대 직장인도 늘고 있다.
보이차의 주가(株價)는 날로 높아가고 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다. 보이차 전문가들은 (개인 소장품이 아닌)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보이차는 제조된 지 5년 이하 것들이 대부분이고 그 이상 오래된 보이차는 중국에서도 수백만 원대로 쉽게 구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유독 보이차에는 라벨을 바꾸거나 오래된 것처럼 연도를 속여 파는 가짜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최근 윈난 성 지방지인 윈난일보는 멍하이(孟海) 지역의 ‘멍하이’ 차창(茶倉) 상표를 도용하고 연도를 조작한 ‘짝퉁 보이차’가 4만 개나 된다고 보도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에 따르면 올해 보이차 수입량은 11월 말까지 104t으로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식품에 대한 안전성 검사만 할 뿐 진위는 검사하지 않고 있다.
보이차 전문가인 전경욱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오랫동안 보이차를 마셔온 40대 이상이 아닌 2030 젊은층은 감별법부터 익혀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권하는 방법은 △라벨을 잘 읽을 것. 예컨대 ‘7572’라 표시된 라벨에서 앞의 75는 1975년 방식으로 만들었다는 뜻이며 결코 1975년에 제조했다는 게 아니다. 뒤의 7은 등급, 2는 공장번호. △차 잎 모양이 또렷또렷한 것을 선택할 것 △발효차이기 때문에 상온(常溫)에서 보관된 제품을 고를 것 등이다.
그러나 전 교수는 “좋은 보이차를 고르는 것은 본인의 몫”이라며 “무엇보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추천하는 한 가지 팁. 내 몸에 맞는 보이차를 고르려면 반드시 시음부터 해야 한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