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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준 칼럼]오늘도 돌아가는 政爭의 낡은 레코드판

입력 | 2008-12-15 20:11:00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정치는 이른바 ‘합의(合意·consensus)의 시대’를 열었다. 보수당과 노동당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대립을 해소하고 ‘합의하는 정치’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다.

그러나 영국의 ‘합의 전성시대’는 무책임과 나눠먹기의 폐해를 누적시켰다. 영국병(病)의 한 원인이었다.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는 1979년 총선 승리를 계기로 ‘합의는 곧 선(善)’이라는 미신에 도전하면서 영국병 치유에 나섰다. 그는 “중간은 없다. 나는 합의 뒤에 숨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행동했다.

정치적 결정이건, 제도나 정책이건 타이밍, 즉 적시성(適時性)이 중요하다. 합의가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선택의 결단과 집행을 미루기만 하면 언젠가 합의에 이른다 해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결과가 되기 쉽다. 실제로 정책의 부분적 실패보다 실기(失機)가 더 문제되는 일이 많다.

한국에선 1987년 민주화 이후 ‘합의=민주주의’라는 정치사회적 통념이 더 굳어졌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독재의 수단으로 ‘다수의 횡포’가 자행됐던데 대한 반동이 컸다. 정치적 소수파인 좌파세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민주주의 과잉 상황에 편승해 ‘민주주의는 합의다’라는 유사(類似)이데올로기를 퍼뜨렸다.

지금 국회의 여당과 제1야당 의석은 한나라당 172석, 민주당 83석으로 2 대 1 이상의 차이가 난다. 그런데도 민주당이 합의해주지 않으면 어떤 법안도, 어떤 결의안도 신속 처리가 어렵다. 지난주 국회 법사위는 의석 1.7% 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점거농성에 한때 마비됐다.

타협 아닌 ‘판깨기 전문’ 민주당

내년 예산안이 법정시한을 열하루 넘긴 13일 한나라당 단독 표결로 통과됐다. 민주당은 이를 ‘쿠데타와 같은 폭거’로 몰아붙이며 “국회 운영 전면중단도 불사하겠다”고 경고했다. 예산안에 이은 쟁점법안 처리 과정에서 판을 깰 수도 있다는 얘기다.

우리 정치에서 몇십 년간 보아온 ‘소수당의 의사일정 방해-다수당의 단독 처리-정국 경색’ 패턴이 변함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수당이 ‘민주주의 파괴자’로 낙인찍히는 양태도 똑같다.

야당이 여당을 견제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당은 야당 의견도 경청해야 한다. 선거에서 야당을 지지한 유권자도 결코 버려서는 안 되는 국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당은 견제를 넘는 ‘심판자’가 되겠다고 해선 안 된다. 그것은 국민의 위임 한계를 벗어난 월권(越權)이고, 국민의 최종 심판권을 가로채는 행위다.

지금 이 나라에서 민주적 절차에 따라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정치주체는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다. 선거에서의 ‘다수 득표’가 불변의 근거다. 그 한나라당이 시급한 예산 확정을 위해 국민한테서 나온 ‘다수 의석’을 가용한 것이 ‘오만과 독선’이고 ‘민주주의 파괴’라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민주당과 민노당에 물으면 ‘합의정신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상식과 합리를 바탕으로 타협해 합의에 이를 생각이 이들에게 과연 있는가. 정치판이 깨지면 어차피 정권 내준 야당보다 여당이 더 손해라는 계산에 따라 움직일 뿐 아닌가.

공작정치 공안정치 밀실정치 야합정치가 횡행하던 권위주의 정권 시절엔 정부여당의 정통성이 취약했고, 민주적 가치가 짓밟힌 사례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 야당의 물리적 의사진행 방해, 농성, 장외투쟁과 떼쓰기조차 국민의 일정한 동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소수의 횡포’가 국가의 위기탈출을 어렵게 하는 형국이다.

민주당은 타협보다는 투쟁이 존재를 과시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반대를 위한 반대’라도 강행할 요량이지만 그 결과는 10%대에 머문 지지율이다. 다수 국민이 ‘생산 없는 투쟁’에 냉소를 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구태의연한 투쟁이 미담(美談)이 되는 시대는 이미 아니다.

여당 不妊정치, 민생에 대한 배임

만약 한나라당이 13일 단독으로라도 예산안을 처리하지 않았더라면 31일 자정까지 밀렸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게 됐다면 ‘아무것도 못하는 여당’이라는 비난이야 한나라당이 덮어쓰면 그만이지만, 재정 운용 자체의 차질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 된다.

물론 여당은 진정성을 가지고 야당과 최대한 타협을 꾀하면서 국민을 설득하는 노력도 더 해야 한다. 그러나 우유부단과 무책임성 때문에 아무 일도 제때 못하는 ‘불임(不妊)정치’는 국민에 대한 배신이요 민생에 대한 배임(背任)이다.

배인준 논설주간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