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인생은 열여섯 꽃다운 나이로 끝났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은 피맺힌 한을 풀지 못해서입니다. 내 청춘을 돌려주십시오.”
김학순(당시 67세) 할머니가 1991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날, 그간의 침묵을 깼다. 국내 거주자로선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실명으로 증언한 것이다.
그는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따라 만주 지역을 떠돌다 아버지 사후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기생집에 양녀로 들어갔다. 평양기생 권번을 마친 16세 때 양아버지에게 이끌려 그 집의 다른 양녀와 함께 중국 중부지방으로 갔다. 양아버지는 이들을 일본군 부대에 팔아넘겼다.
소규모 부대의 가건물에는 이미 3명의 한국 여성이 와 있었다.
“그때 일은 말로 다 못해요. 인간 이하의 생활이었기에 생각을 안 해야지…. 입술을 깨물고, 도망가려다 끌려오고….”(1991년 인터뷰에서)
4개월 뒤 한국 상인(당시 31세)의 도움으로 탈출했지만 비운은 끝나지 않았다. 6·25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마저 익사사고를 당했다.
날품팔이, 행상, 파출부로 생계를 이으며 400만 원짜리 전세 단칸방에서 메마른 나날을 하루하루 견뎠다. 매달 정부에서 주는 쌀 10kg, 일당 3만 원의 취로사업장이 그를 지탱해주는 양식이었다.
1990년 6월 일본이 ‘일본군은 군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표하자 그는 격분했다. 폭로를 결심했고 실행에 옮겼다. 취로사업장에서 원폭피해자 이맹희 할머니를 우연히 만나면서 용기도 얻었다.
‘나도 일본에 억울한 일이 많고 내 인생이 하도 원통해서 어디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던 참이라 내가 군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 기록증언 중)
그러나 그는 그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일이 무척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1991년 12월 김 할머니 등 3명이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도쿄지방법원에 청구하고 나서야 국제사회가 이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소송 이후 더 많은 피해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공개 증언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알뜰히 모은 2000만 원을 불우이웃을 위해 기탁하고 일본의 기만적인 국민기금은 절대 수령하지 말고 일본 정부의 사과를 꼭 받아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1997년 12월 16일 새벽, 고통 많은 지상에서의 삶이 끝났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