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화자’로 불리던 사나이 유니폼 벗고 대단하게 변신했다
힘겨울 때일수록 사람이 그립습니다. 옛사람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스포츠동아는 스토브리그 동안 팬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는 추억 속의 스타를 찾아가는 ‘피플 인 메모리’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은퇴 후 스포츠계에 몸담고 있지 않아 이름마저 가물가물해지는 ‘왕년의 선수’. 그들이 개척해나가고 있는 새로운 인생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프로야구 선수 출신이 초등학교 선생님이래. 임용고시까지 봤다더라고. 내 동기 화동이 말이야. 연락이 안 되다 최근에 한번 만났어. 정말 영화 같은 일 아니야?”
히어로즈 김동수(40)의 말이다. 김동수는 스포츠동아가 추억 속의 스타를 찾아가는 ‘피플 인 메모리’ 코너에 지화동을 적극 추천했다. 메이저리그 선수 출신이 교사로 변신했다는 얘기는 종종 들어봤지만 한국 프로야구 선수 출신이 선생님으로 변신했다니….
그것도 체육 선생님이 아니라 임용고시까지 합격한 초등학교 선생님이라고 하니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한화 출신의 내야수 지화동(41). 그는 북한산의 백운대(白雲臺)를 바라다보는 서울 도봉구 쌍문동의 백운초등학교에서 6학년 4반 담임선생님을 맡고 있었다.
○천진난만 초등학생들과 유쾌한 수업
교실 문을 노크했다. 교사 특유의 수수한 옷차림을 한 그가 빙그레 웃으며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은퇴 후 14년. 세월은 그렇게 흘렀고, 그의 모습도 세월 따라 변해 있었다.
“우리 선생님 예전에 야구 잘했어요?” 한 학생이 기자에게 용감하게 질문하자 다른 친구들이 기다렸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천진난만 그 자체였다. “자∼자∼ 수업해야지!” 선생님은 교편으로 책상을 두들기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익숙한 솜씨였다.
국어시간. 과거 초등학교의 교과내용과는 너무나 달랐다. 선생님이 분필로 칠판에 필기를 하지 않는 것도 신기했다. 대신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자 글씨가 화면에 나타났다.
‘우리들 마음속에 폭력에 대한 욕망이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주제였다. 그리고는 ‘해결방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이어졌다. ‘컴퓨터 게임을 해요’, ‘잠을 자요’, ‘먹는 걸로 풀어요’, ‘운동으로 풀어요’, ‘노래를 불러요’…. 갖가지 대답들이 나왔다.
이때 한 학생은 “자학을 해요. 그냥 머리를 박아요”라고 대답해 폭소를 유발했다. 선생님은 “그럼 마음이 시원해? 특이하네∼. 또 있나요?”라며 능숙하게 수업을 진행해 나갔다.
○‘야구신동’ 지화동
그는 어릴 때 ‘야구신동’으로 불렸다. 천안북일고 1학년 때인 1983년 화랑기에서 타율 0.500을 기록하며 대회 MVP까지 거머쥐었다. 3학년 때는 청소년대표로 발탁됐다. 김동수 박동희 이병훈 김경기 등이 청소년대표 동기들이다. 동국대 졸업반 때인 1990년 1차지명을 받고 한화의 전신 빙그레 유니폼을 입을 정도로 각광받았다.
선수시절 별명은 ‘지화자’. 빙그레 팬들은 그가 안타를 치면 “지화자 좋다”를 외쳤고, 그가 멋진 수비를 펼치면 “얼씨구 좋다”며 박수를 쳤다. 친동생 지화선이 93년 빙그레에 입단하면서 ‘형제 선수’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그러나 프로에서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90년 빙그레 주전 유격수는 MVP를 수상한 장종훈이었다. 장종훈이 지명타자와 1루수로 전환한 뒤에도 아마추어 시절부터 명성을 날리던 황대연과 조양근 등 선배들이 버티고 있었다.
92년 주전 유격수로 입성해 122경기를 소화하며 팀이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는 데 힘을 보탰다. 그러나 93년 신인 허준에 자리를 내주고 2루수로 전환해 113경기를 소화했다. 한화로 팀명을 바꾼 94년 은퇴했다. 프로 5년간 통산 404경기 806 타수 167안타(타율 0.207).
○노래방 사장님에서 교사를 꿈꾸다
유니폼을 벗은 뒤 처음 손 댄 일은 노래방 운영. 그러나 3년쯤 지나 IMF 사태가 터지며 노래방도 타격을 받았다. “손해도 많이 봤죠. 야구만 했지, 배운 게 있나요? 앞으로 뭘 해야할까, 막막하더라고요.”
그 때 우연히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초등학교 기간제 교사 모집공고. 동국대에 야구 특기생으로 들어가면서 사범대학 체육교육과 86학번으로 입학한 인연으로 중등 정교사 자격증은 땄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교사를 전혀 꿈꾸지 못하던 그였다.
초등학교 교사는 기본적으로 교대 출신이어야 한다. 그처럼 사범대학 출신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사로 진출한다. 그런데 IMF 사태로 나이든 초등학교 교사들이 대거 명예퇴직하면서 일시적으로 중등 정교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도 지원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는 98년 임시직인 기간제 교사로 백운초등학교에 첫발을 내딛게 됐다.
○야구가방 대신 책가방 메고 임용고시 도전
기간제 교사를 하면서 정교사에 도전하기로 마음 먹었다. 일반학생도 어렵다는 교원 임용고시. 그러나 목표를 세운 그는 물러설 수 없었다. 하루 4시간씩만 자면서 2년 가까이 공부와 씨름했다.
“야구가방만 들고 다니던 제가 뒤늦게 책가방을 들고 도서관, 학원을 다니려니 보통 힘든 게 아니었어요. 기초가 안 돼 있으니 이해 안되는 게 너무 많았고. 공부하는 건 창피하지 않은데 주위 시선 때문에 창피하기도 했죠. 당시 나이가 서른둘이었고,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이 스물둘, 셋이었으니까. 말들은 안했지만 속으로 ‘야구선수가 무슨 교사 시험을 친다고 저래?’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것 자체도 힘든 일이잖아요. 얼마나 경쟁이 치열해요. ‘그것도 해냈는데 이 게 안 되겠나’ 하는 생각으로 도전했죠. 솔직히 공부보다 야구가 어려운 것 같아요.”
그는 공부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마침내 초등학교 임용고시에 합격했다. 그야말로 인간승리였지만 그는 겸손해했다. “주위 도움이 컸죠. 기간제 교사를 할 때 옆에서 교장선생님과 동료교사들이 많이 격려해줬어요. 당시 시험 난이도도 지금 교대 출신들이 보는 임용고시만큼 어렵진 않았어요. 그랬으니까 제가 합격했겠죠.”
○3만관중 그라운드보다 더 떨렸던 교실
2000년 첫 정식 발령을 받은 곳도 백운초등학교. 5년마다 전근을 가는 게 관례지만 그는 10년간 이곳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내년에는 다른 학교로 옮긴다고 한다.
백운초등학교는 류택현 설종진 강혁 등이 나온 야구명문으로 지금도 강호로 꼽히고 있다. 체육부장을 겸하고 있는 그는 가끔씩 야구부 선수들에게 조언을 해주기는 하지만 선수지도는 코치에게 일임하고 있다.
“음악 영어 실과는 교과담당들이 있어서 크게 힘든 점은 없어요. 처음엔 애들 다루는 게 힘들었죠. 엉뚱한 질문을 하기도 하고, 애들 사고방식과 단어수준도 잘 모르니까. 특히 학부모들을 모아놓고 공개수업을 할 때는 너무 떨리더라고요. 3만관중이 들어찬 그라운드에서는 안 떨렸는데. 지금은 능숙해졌죠. 노하우가 쌓이니까.”
○교사는 나의 운명
그는 이 동네에서는 유명인사다. 프로야구 선수 출신이 초등학교 교사로 변신한 인생역정 자체가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학부모들이 애들에게 사인 받아오라고 시키는 일도 잦았어요. 가끔씩 학교에 오시는 학부모들도 제가 교사를 하고 있는 걸 신기해해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죠.”
학교에서 그는 인기스타다. 선수시절부터 입심 좋기로 소문난 그였기에 학생들 사이에서는 ‘개그맨’으로 통한다. 한 학생은 “우리 선생님 너무 웃겨요. 가끔씩 무섭기도 하지만 너무 좋아요”라고 자랑했다. 지나가던 동료 여교사는 “지화동 선생님 인기 짱이에요. 교사들 사이에서도, 학생들에게도”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10년째 교사생활. 그는 은퇴 후 야구장에는 한번도 가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애들 가르치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예전부터 애들을 좋아했어요. 지금도 성격적으로도 잘 맞는 것 같고. 제 천직이라고 생각해요. 교사라는 직업이 프로야구 선수보다 연봉은 떨어지지만 딴짓 안하면 되잖아요. 야구를 한 건 후회 안 해요. 그때는 야구가 좋았으니까. 야구에서 인생도 배웠어요.”
동심에 파묻혀 사는 그의 미소도 순수했다. 북한산 백운대 허리를 휘감은 흰구름만큼이나.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사진=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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