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P 시장예측 뒤엎고 공격적 금리인하 - 자금공급
전문가 “유동성 거품 키워 급격한 인플레 부를수도”
‘침체된 경기를 살리고 시장에 돈이 돌도록 만들기 위해 필요한 만큼 돈을 찍어 풀겠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16일(현지 시간) 발표한 ‘제로금리’와 ‘양적완화’ 정책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FRB가 중앙은행으로서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동안 금리 결정 배경 등을 성명서 발표로만 알렸던 FRB는 이날 이례적으로 기자설명회를 열었다.
남은 것은 시장의 움직임이다. FRB가 아무리 기준금리를 내려도 지금처럼 금융회사가 대출을 꺼려 시장에 돈이 돌지 않는다면 경기침체는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FRB의 금리 결정을 앞두고 시장에서는 0.5%포인트 정도의 금리 하락을 예상했었다. 하지만 이런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FRB가 1954년 지표금리 제도를 도입한 이후 처음으로 ‘제로금리’ 시대가 열린 것이다. FRB가 목표금리를 특정 수치가 아닌 0∼0.25%라는 ‘범위’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연방기금’ 가맹 은행이 FRB에 자금을 예치할 때 지급하는 이자(0.25%)를 계속 지급하기 위한 것이다. FRB는 연방기금 금리를 기준으로 은행 예치금에 대한 이자를 지급한다.
이날 금리 인하로 FRB는 지난해 9월 이후 총 10차례에 걸쳐 5∼5.25%포인트의 공격적인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블룸버그 등 미국 언론은 금리인하 결정에 대해 “FRB 94년 역사에서 가장 대담한 조치”라고 평가했다.
미국경제는 지난해 말 침체 국면에 들어선 이후 2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지난달 실업률은 6.7%로 1993년 이후 최고치로 치솟았다.
위기의 근원지인 주택시장도 여전히 침체 국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날 발표된 11월 신규 주택 착공 건수는 사상 최악의 수준이었다.
○양적 완화 정책으로 승부
이날 FRB가 발표한 ‘양적완화’ 정책은 ‘제로금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제로 금리’로 인해 중앙은행의 전통적인 경기조절 수단인 통화정책의 여지가 사라졌지만 시장에서 장기 국채와 패니메이, 프레디맥 등 모기지 업체가 발행한 채권 등을 사들여 통화량 공급을 늘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FRB가 장기 국채 등을 매입하면 금융회사들이 자금이 늘어나 가계와 기업에 대한 대출 여력이 증가하고 채권 금리가 낮아지면서 시장 금리 하락을 유도할 수 있다.
극심한 디플레이션에 시달렸던 일본은 2001년부터 5년간 은행들이 보유한 장기국채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양적 완화’ 정책을 동원했었다.
하지만 FRB가 시장에 돈을 더 푼다고 해도 금융회사들이 대출에 나설지는 미지수다.
금융위기 이후 촉발된 신용경색 현상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FRB의 공격적인 통화정책으로 시중에 과도하게 유동성이 풀리면서 또 다른 거품을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앨런 블라인더(경제학) 프린스턴대 교수는 “FRB가 향후 적절한 시기에 과잉 유동성을 어떻게 회수하느냐가 문제”라며 “금융회사들이 현금을 움켜쥐려고 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종료되면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뉴욕=신치영 특파원 higgledy@donga.com
▼돈풀어도 경기 안풀리는 ‘유동성 함정’ 우려▼
日선 장기불황 겪어… 재정확대 병행해야
유동성함정(liquidity trap)이란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낮춰 시중에 아무리 돈을 풀어도 투자와 소비가 늘지 않아 경기가 활성화되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1929년 대공황 때 막대한 돈을 시중에 풀었지만 경기가 살아나지 않은 것을 두고 케인스가 한 말이다.
일반적으로 금리가 낮아지면 기업은 투자를 늘리고, 가계의 경우 대출이자 등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어서 소비가 늘어난다. 그러나 유동성함정에 빠지면 정부가 통화 공급을 늘려도 이자율이 낮아지지 않으며 수요도 커지지 않는다. 금융팽창정책이 이자율을 낮추고 투자를 늘림으로써 소득을 증대시키는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제로금리 근처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유동성함정을 가장 잘 보여준 예는 10년간 지속된 1990년대 일본의 장기불황이다.
이번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금리인하와 관련해 일각에서 제기하는 유동성함정 우려에 대해 한국금융연구원 신용상 거시경제팀장은 “아직은 판단하기에 유보적이며 시중금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지금처럼 신용위기로 인한 경기침체가 심각할 때는 통화정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재정정책은 물론 기업구조조정을 통한 신뢰회복 등을 적극적으로 펴나가야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