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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이 연구]일제강점기 방송문화 관심 엄현섭 교수

입력 | 2008-12-22 02:58:00


“경성방송국 초기엔 軍國색채 없어

재정자립 위해 연예-오락 집중편성”

“1927년 2월 라디오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을 개국한 일제는 우선 청취자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청취자를 확보하는 방법은 재미있는 방송 콘텐츠를 보급하는 것이었지요. 그 과정에서 위안방송(慰安放送)이 등장하게 됩니다.”

한림대 일본학연구소 엄현섭(35·사진) 연구교수는 일제강점기 위안방송을 중심으로 근대조선의 대중문화를 연구한다. 위안방송이란 라디오 드라마와 대중가요 등 대중연예 콘텐츠를 가리키는 용어로 1940년대 초반에 이르러 ‘연예와 음악’이란 말로 대체됐다.

위안방송에 주목하는 이유는 한국 대중문화의 시원(始原)을 찾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국민체조와 여러 방송극의 사례에서 보듯 일제가 위안방송을 제국주의 건설에 이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대중문화 발전의 기틀이 마련된 측면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라디오 방송극이 드라마로 발전하는 과정을 예로 들었다.

“경성방송국에서 내보낸 라디오 방송극은 처음에는 극장무대에서 공연한 것을 그대로 방송했기 때문에 무대극의 연장이었습니다. 그러다 1934년 토월회의 일원이었던 방송극작가 김희창과 윤성구의 발의로 순수 방송극을 위한 단체인 ‘라디오 플레이 미팅’이 만들어졌지요. 여기서 오늘날 라디오 드라마의 모체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는 방송사(放送史) 연표를 분석해 보면 경성방송국 초기 6년은 위안방송 개발에 주력한 시기였으며 노골적인 군국주의 색채를 찾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조선총독부에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청취료를 내리는 한편 청취율을 높이기 위해 대중친화적인 다양한 위안방송을 만드는 데 몰두했다는 것이다. 경성방송국의 모델이 된 도쿄방송국도 개국 초기 최대사업은 위안방송 제작이었다고 한다.

국문학도인 그가 대중연예 연구에 발을 담그게 된 것은 집안 내력과 관련이 있다. 일제 때 가극단 부단장을 지내고 광복 후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외조부의 얘기를 듣고 자란 그는 대학 3학년 때 “외할아버지가 활동했던 한국 대중연예의 여명기를 연구해 보자”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2006년 2월 라디오 드라마와 무성영화, 축음기 음반 등 근대 미디어의 텍스트를 통해 근대조선의 문화를 분석한 ‘한국 근대 미디어 텍스트와 극양식 연구’라는 논문으로 성균관대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 심사과정에서 ‘대중연예가 문학이 다룰 주제인가’라는 지적도 나왔다고 한다. 그는 당시 “문학에 있어서 주된 매체는 인쇄매체라고 할 수 있지만 근대 미디어의 대본이라는 형태로 재창조되는 것도 문학”이라고 대답했다.

이후 ‘라디오연감에 나타난 식민지기 위안방송과 그 성격’ 등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한 그는 최근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연구지원자로 선정됐다. 2011년 8월까지 3년 동안 진행되는 ‘근대 한일 라디오 방송과 방송콘텐츠 비교연구’다.

그는 “한일 대중문화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주요 방송극의 작품 위주로 정리하고 서로의 공통점과 특수성을 분석할 계획”이라고 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