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자는 100억 불 수출해야 해.”
1973년 개각 후 신임 각료들을 위해 마련한 다과회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건설부 장관에서 자리를 옮긴 장예준 신임 상공부 장관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장 장관은 “좁은 국토에 자원도 없고 세계 3위의 높은 인구밀도를 갖고 있던 우리나라에서 수출드라이브 정책의 최선봉에 섰던 국가 통치권자의 간절한 염원이 배어 있는 말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한국을 둘러싼 국제경제 환경은 좋지 않았다.
1973년 4차 중동전 발발로 아랍 산유국들이 미국 등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국가에 원유 수출을 중단했고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원유가를 배럴당 5.12달러에서 11.65달러로 128%나 인상했다. ‘오일 쇼크’로 세계가 몸살을 앓던 시기였다.
또 보호무역 추세가 강화되면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통상 마찰도 확대됐고 그해 한국의 수출실적은 32억2500만 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국은 마침내 1977년 12월 22일 ‘수출 100억 달러 고지’에 등정했다.
서독이 수출 10억 달러에서 100억 달러를 달성하는 데까지 11년, 일본이 16년 걸린 데 비해 한국은 7년 만에 돌파한 것이다.
철강, 전자, 선박, 금속 기계류 등 중화학 제품 수출이 100억 달러 돌파에 크게 이바지했고 때마침 일어난 중동건설 경기 붐으로 해외건설 수주가 급증한 것도 큰 몫을 해냈다.
1964년 수출 1억 달러를 기록한 한국은 13년 만인 1977년 100억 달러를 돌파했고 2008년 4470억 달러 안팎의 수출이 예상된다.
그런데 기획재정부는 최근의 글로벌 경제위기 여파로 2009년 수정 예산안의 전제가 되는 경제지표 전망을 통해 2009년 수출이 당초 목표했던 4950억 달러에서 4900억 달러로 50억 달러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반면 2009년 수입은 4956억 달러로, 무역수지가 56억 달러 적자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에 따라 정부가 당초 최대 목표치로 제시한 ‘2009년 수출 5000억 달러’는 사실상 달성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안영식 기자 ysa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