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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홀 밑 3살배기가 손을 꽉 잡던 순간 잊을 수 없어”

입력 | 2008-12-22 17:49:00

올해 영웅소방관에 선정된 경기도 의정부 소방서 119 구조대 이창인 소방장. 위험한 순간에도 냉정을 잃지 않는 정확한 판단력과 항상 현장에서 앞장 서는 대범함을 갖춰 '구조 현장의 히딩크'라 불린다. 우경임 기자


길바닥 맨홀 아래서 아이 울음소리가 난다는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할 때만 해도 그는 긴가민가한 상태였다. 마침 경찰에 세 살배기 아이 실종 신고도 들어와 있던 참이라고 했다. 혹시 그 아이가….

맨홀 뚜껑을 열고 포크레인과 콘크리트 절단기, 착암기까지 동원해 콘크리트와 흙을 제거하고 하수관을 부수며 들어간 그의 앞에 희미한 형체가 보였다. 작고 연약한 몸집의 아이가 배고픔에 지치고 울음도 말라버렸는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가 손을 뻗었을 때 아이는 갑자기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그의 손을 꽉 잡더니 순간 스르르 힘이 풀려 버렸다.

"살고 싶다고 외치는 아이의 절박한 비명을 듣는 것만 같았어요. 나중에 그 아이가 건강한 모습으로 부모와 함께 감사 인사를 하러 찾아왔는데 어찌나 기쁘던지…."

경기도 의정부 소방서 119 구조대 이창인(39) 소방장. 그가 목숨을 내놓고 살아가는 위험지대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6년 전 여름 맨홀에 3일간 갇혀 있던 세 살배기 남자아이를 구할 때와 같은 순간들 때문이다.

그는 "생명을 구할 때의 충만함을 경험하고 나면 구조 현장을 떠날 수 없다"면서 스스로 "구조에 중독됐다"고 표현했다.

그는 15년간 5000여건의 구조 활동을 통해 1500여명을 구조해온 실적을 인정받아 올해의 '영웅 소방관' 중 한 명으로 꼽혔다. 소방방재청이 추천하고 한국사회복지협의회와 S-OIL㈜이 주관한 '영웅소방관'에는 모두 8명이 선정됐다. 서울 경기 지역에서는 이 소방장이 유일하다.

15년간 그가 뛴 '현장'은 화재 사건 뿐 아니라 깨진 유리를 들고 자살 소동을 벌이다 뛰어내린 남자의 구조부터 벌레에 물려 퉁퉁 부은 주부의 손가락에서 반지 절단기로 반지를 제거해주는 일까지 해가 거듭될수록 다양해졌다.

하지만 제아무리 사건이 다양해지고 장비가 발달해도 소방관은 생사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어야 한다. 올해 10월 경기 의정부시 용현동 상가 화재 사건에서 모두 5명의 목숨을 구할 때의 일이다.

1층은 전소되고 3층에 고립된 주민들을 구하러 불길과 싸우며 한 층 한 층 올라가던 이 소방장은 3명의 주민들과 함께 3층 한 방에 갇혀 버렸다. 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혼자 남은 상태였다. 검은 연기가 건물을 메우자 옆에 있던 주민들은 공포에 휩싸여 판단력이 흐려져 창문으로 무작정 뛰쳐나가려 했다.

그는 창문으로 뛰어내리려는 사람들을 붙잡아 진정시키고 자신의 호흡기로 숨을 쉬도록 도왔다. 건물 밖에 안전 매트가 깔린 뒤에야 차례로 창밖으로 밀어 전원 탈출 시킨 다음 자신도 뛰어내렸다.

이런 긴박한 구조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 이 소방장은 "소방관은 구조현장에서도 심장 박동수가 평소와 같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험한 순간에도 냉정을 잃지 않는 정확한 판단력과 항상 현장에서 앞장 서는 대범함을 갖춰 '구조 현장의 히딩크'라 불리는 이소방장이지만 남모르는 어려움도 있었다.

경사진 계단조차 오르는 것조차 무서웠던 '고소공포증'을 갖고 있었던 것. 이 때문에 훈련과정에서 고충도 많았다.

"타워크레인 위에서 자살 소동이 나면 절로 뒷걸음질이 치고 싶더라고요. 하지만 구조팀의 리더가 현장을 장악하지 못하면 동료대원도, 구조를 요하는 시민도 모두 위험에 빠집니다. 내가 무너지면 모두 다 죽는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되니 고소공포증은 잊어버리게 되더군요."

이 소방장은 1993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중 소방관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가 덜컥 합격했다. 우연히 들어선 길이지만 현장을 뛰다 보니 천직임을 알게 되었다. 10월에 열린 경기도 소방가족 체육대회에 탁구선수 대표로 나가 1등을 했을 정도로 워낙 활동적이라 적성도 맞았다.

이런 이소방장이지만 구조에 실패한 날도 있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잠도 못 이루고 꿈속에서 현장이 재연되어 밥도 제대로 먹지 못 했다. 요즘은 어느 정도 극복했지만 손 쓸 틈도 없이 눈앞에서 구조 대상자를 놓쳐버린 날엔 어김없이 폭음을 하게 된다.

같은 구조대 소속인 이호관 소방관은 "어떤 위험한 현장에서도 대원들과 시민들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이라며 "프로의식이 투철한 존경하는 선배"라며 수상을 같이 기뻐했다.

'2008 영웅소방관 시상식'은 22일 서대문소방서 대강당에서 열렸다. 최고 영웅소방관에 선정된 배몽기 소방교에게는 2000만 원, 이창인 소방장 등 영웅소방관 7명에게는 각각 1000만 원씩의 포상금이 전달된다.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