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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07년 오산학교 개교

입력 | 2008-12-24 03:00:00


1907년 12월 24일,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현재의 서울 오산중고교) 개교식. 입학생은 불과 7명이었지만 설립자 이승훈(1864∼1930)의 목소리엔 힘이 넘쳤다.

“지금 나라가 날로 기울어져 가는데 그저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깨어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교육이 필요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7명의 학생밖에 없지만 차츰 자라나 70명, 700명에 이르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일심협력하여 나라를 남에게 빼앗기지 않는 백성이 되기를 부탁합니다.”

정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던 이승훈은 열 살이 되던 1874년 학업을 중단하고 유기(놋그릇) 상점의 사환으로 취직했다. 열세 살 때 보부상이 되어 평안도, 황해도 시장을 돌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한 그는 1887년 유기공장을 세워 기업가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의 와중에 상점과 공장이 불타버리는 참화를 겪었다. 다시 무역업을 통해 재기에 성공한 그는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었다.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국운이 기울어가면서 그의 사업도 함께 기울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마저 잃어버리자 그는 좌절과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1907년 7월 우연히 도산 안창호의 ‘교육진흥론’이란 강연을 듣게 됐다. “교육으로 백성을 일깨우지 않으면 독립도 있을 수 없다”는 도산의 말은 이승훈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승훈은 바로 그 자리에서 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했고 오산학교는 그렇게 태어났다.

오산학교엔 조만식 신채호 염상섭 김억 이광수 유영모 등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모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오산학교엔 늘 민족정신이 넘쳐흘렀다. 1909년 3월 2일, 순종 황제와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전국을 순행하면서 정주역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역에 나온 모든 군중과 학생들은 한 손엔 태극기, 다른 한 손에 일장기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오산학교의 교직원과 학생들은 태극기만 들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후 오산학교는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승훈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1919년 3·1독립운동을 주도하자 일제는 오산학교를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보고 탄압을 가했다. 오산학교를 아예 없애기 위해 일제는 교사(校舍)를 불태우기도 했다.

시련은 있었지만 이승훈의 정신 그대로 오산학교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