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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허문명]새는 날개 아닌 머리로 난다

입력 | 2008-12-24 20:26:00


진 커크패트릭(2006년 작고) 전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미소(美蘇) 긴장이 팽팽하던 1984년 미국 내 일부 지식인을 향해 쓴소리를 했다. 무슨 문제만 생겼다 하면 ‘제 나라 먼저 욕하기 증후군’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문제를 소련이 아닌 미국 탓으로 돌리면서 ‘결국 두 나라 다 똑같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1979년 소련이 전략적 요충지인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과 1983년 미국이 좌경화를 우려해 그라나다를 침공한 것을 같은 맥락에서 본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9·11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라덴이나, 이를 응징하기 위해 전쟁을 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나 다 같다는 논리를 펴기까지 한다. 커크패트릭은 “이런 행태야말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이 구사하는 중요한 전략 중 하나인 ‘의미조작(意味造作)’에 넘어가는 것”이라며 이를 ‘도덕적 등가성(等價性)의 오류’라고 정의했다.

이런 오류는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도 흔하다. “노근리 사건만 두고 6·25전쟁 때 미군과 한국군이 북한군과 똑같이 양민학살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군사정부 시절 남한의 인권침해가 북한 인권침해와 똑같다는 주장들이 그런 예다.”(이상돈 중앙대 교수) 이처럼 좌파 지식인 중에는 북한에 대한 ‘내재적 접근’ 운운하며 무슨 일만 생기면 북한보다 남한 탓을 먼저 하는 사람들이 있다. 북한에는 없고 남한에만 있는 인권, 민주라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말이다.

자본주의 비판도 마찬가지다. 사회주의 국가에도 존재하는 빈부격차가 마치 자본주의에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 체제만이 사상 언론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기 때문인데 좌파들은 이를 간과하거나 애써 외면한다. 김정호 자유기업원장은 “비판의 자유가 있는 사회라야 불평등을 비난할 수 있다. 북한에서 체제 비판을 하면 바로 수용소행이다. 이런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비판은 성급한 오류를 범한다”고 지적한다.

이념과 체제가 전혀 다른 북한과 대치하는 세계 유일 분단국가인 남한에서 정신무장이 생명인 군(軍)이나 한 사회의 공식적인 지식체계를 담는 교과서에 무한대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허용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사평론가 복거일 씨는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는 이념 측면에서 균형이나 중립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헌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지향한다’는 구성원리(이념)를 명확히 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이념균형은 헌법이 정하는 틀 속에서의 균형이지 그것을 벗어난 이단(異端·사회주의나 공산주의)까지도 균등하게 다뤄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소수에 대한 배려’도 민주주의의 원리인 다수결을 인정할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과 같다.

“이념논쟁은 지겹다” “이념은 낡았다”고 하는 주장들도 ‘지겹고 낡은 것’은 좌파 이념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공동체를 이끄는 가치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것을 도외시한 기계적인 균형논리는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의미조작’에 넘어가는 것이다.

1980년대를 풍미한 좌파 논객 리영희 씨는 “새(鳥)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했지만 날개는 머리(腦)가 지휘한다. 뇌가 분열되어 있는 새가 어떻게 날개를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겠는가.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