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오 국회의장이 국회 파행 일주일째인 24일 국회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갖고 “여야가 조속히 만나 먼저 시급한 민생 관련 법안과 세출 관련 법안을 이번 임시국회에서 처리하는 데 합의하자”는 중재안을 제시하고 있다. 안철민 기자
“여야 모두 소수 지지자만 보고 정치”
《김형오 국회의장은 24일 “여야 정당들이 소수의 열렬한 지지자들만 보고 정치를 하는 것 같다. 열렬한 지지자들이 다수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김 의장은 “소수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국민 정서를 대변하지 못 한다”며 여야가 모두 한 발짝씩 물러나 타협점을 찾으라고 촉구했다. 다음은 본보와의 일문일답.》
“타협 가능한 민생법안부터 빨리 처리
사회질서법-미디어법은 충분히 협의
직권상정 ‘하라 말라’ 주문하는건 무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의 상정 과정에서 해머와 전기톱까지 동원된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가뜩이나 경제 사정도 어려운데 정치권이 경제 살리기에 매진하고 서민에게 한마음으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 줘야 하는 상황에서 국민께 송구스럽다.”
―24일이 김 의장이 제시한 여야 회동 직권중재 시한인데 민주당은 거부했다.
“민주당 사정이 어렵다고 하던데,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의장이 부르는데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매우 서운하고 유감스럽다. 어떤 경우에도 대화의 문틈은 있어야 하는데 민주당은 대화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럴 때일수록 원내 책임자가 대화를 해야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여야 합의를 유도할 계획인가.
“3명의 원내대표가 모인 자리에서 중재안을 제시하려고 했는데 회동이 불발돼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권선택 자유선진당 원내대표는 오늘 개별적으로 만나서 제안했고, 원혜영 민주당 원내대표에겐 전화로 설명했다. 중재 내용은 세 가지다. 우선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또는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난 법안들 중에 민생 관련 법안을 먼저 처리하자는 것이다. 재외국민 투표권에 관련된 공직선거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당장 내년부터 선거를 못 치른다. 또 내년도 예산안 지출과 관련된 세출 관련 법안들과 서민경제와 밀접한 민생법안을 통과시키자. 규제개혁에 관한 법들도 포함된다. 이런 것은 여야 간 쟁점이 없으니 빠른 시일 안에 처리해야 한다. 두 번째로 여야가 민감하게 다투고 있는 사회질서법과 미디어 관계법들은 충분히 협의해 이번에 가능한 것부터 처리하자는 것이다. 세 번째로 여야가 어떤 전제나 장벽을 깔지 말고 무조건 대화를 하라는 것이다. 대화를 통해 조건을 걸든지 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회질서법과 미디어관계법은 모두 다음 회기에 처리하자는 것이냐.
“타협이 가능한 쟁점 법안과 타협이 어려운 법안을 구분해서 하자는 얘기다. 타협이 가능한 쟁점 법안들은 충분히 노력해 이번 회기에라도 처리하면 된다. 도저히 타협이 안 되는 것은 더 시간을 갖고 논의하자. 이 정도의 중재 원칙에도 협의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 당이 이상한 것 아닌가.”
―민주당은 직권상정을 하지 않겠다는 의장의 확답을 요구하고 있는데….
“직권상정은 원칙 문제이다. 직권상정을 좋아하는 의장이 어디 있겠나. 국회의장에게 직권상정을 ‘해라’ ‘말라’고 주문하는 것은 무례다. 각 당에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줘야 한다. 직권상정이 만만한 일이 아니지 않나. 아주 예외적인 조치기 때문에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국 최종 판단은 국회의장이 외롭게 하겠다.”
―민주당은 의장이 중립성을 지키지 못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내가 한나라당 출신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국회의장이 된 이래 양심을 걸고 국회의 권위와 권능을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한나라당도 민주당도 서운하다고만 하더라. 하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얘기해보라.”
―김 의장이 전임 국회의장과 달리 퇴임 후 당으로 돌아와 정치를 계속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여권의 직권 상정 요구를 뿌리치기 어렵다는 관측도 있다.
“20년 정치생활 하면서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거나 계보의 입장을 떠받들기 위한 정치를 한 적이 없다. 장래에 뭘 하기 위해 그걸 염두에 두고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세월이 나를 정치에서 몰아낼 수도 있고, 반면 내가 아무리 죽을 쒀도 정치를 더 할지도 모른다. 나도 인간이라 꼭 도와달라면 고려는 하겠지만 옳은 길이 아니라면 도와줄 수가 없는 것 아니겠나.”
―역대 의장들의 직권상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바람직한 의회의 모습이 결코 아니다. 아마도 직권상정은 다수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소수의 방해로 다수의 의견이 방해받고 집행되지 못할 때를 대비한 장치인 것 같다.”
―여당은 대화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면 결국 국회법과 다수결의 원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100% 진리는 아니다. 다수결 원칙만 갖고 운영을 할 거면 소수당은 필요 없는 것 아니냐. 소수에 대한 배려와 다수결의 원리가 조화롭게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다수와 소수가 똑같이 나눠먹는 것은 국민이 뜻이 아니다. 때문에 여당의 책임이 더 큰 것이다. 형은 억울할 때가 있더라도 양보해서 동생을 잘 끌고 가야 한다.”
이종훈 기자 taylor55@donga.com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