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는 올해 초 새 정부의 예산 10% 절감 방침에 따라 동해선 남북출입사무소 야외화장실 설치비 1억2700만 원을 절감하겠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야외화장실은 11월 예정대로 설치됐다. 지금은 금강산 관광이 중단돼 이용자가 거의 없는 형편. 통일부 남북출입사무소 관계자는 “불필요한 예산을 절감하라고 해서 화장실 설치비를 삭감했다”며 “하지만 5월경 상부에서 절감한 예산을 쓰라는 지시가 내려와 그냥 화장실 설치비로 썼다”고 말했다.
불필요한 예산을 절감해 경제 살리기 등 새 정부의 정책방향과 맞는 곳에 활용하겠다는 정부 예산 절감 및 활용 지침이 일선 부처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李정부 주요공약… 감독 안돼 편법 판쳐
일부 부처선 명퇴수당으로 사용하기도
‘정부 예산 10% 절감’은 이명박 정부의 주요 공약 중 하나다. 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 “국가 살림을 조금만 알뜰하게 하면 10%를 줄일 수 있고 복지비 교육비 장학금 등을 몇 조 원 더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취임 후 각 정부 부처는 이 대통령의 공약에 따라 예산을 절감했다. 하지만 상당수 부처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예산을 절감하거나 애써 절감한 예산을 다시 그냥 써버렸다. 전문가들은 이런 행태를 ‘관료주의 행정의 표본’이라고 지적한다.
각 부처의 이러한 행태는 동아일보 경제부가 최근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11월 말 기준으로 정부 15개 부처의 예산 절감 및 활용 명세를 받아 분석한 결과 드러난 것이다.
○ 절감했다는 곳에 예산 다시 투입
법무부는 법무연수원 운영비 23억9500만 원 중 1억6700만 원을 절감했다가 1억5500만 원을 재활용했다. 연수원 관계자는 “절감된 예산으로는 도저히 연말까지 연수원을 운영할 수 없어서 다시 요청해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연수원 운영 예산은 거의 변동이 없었지만 법무부는 1억6700만 원을 ‘절감 실적’으로, 1억5500만 원을 ‘활용 실적’으로 정부에 보고했다. 법무부는 이런 식으로 42개 절감사업 중 6개에 예산을 전액 재활용했고, 25개에 일부 재활용했다.
통일부는 예산을 절감한 44개 사업 중 26개 사업에 같은 금액을 재투입했다. 한마디로 ‘눈속임 절감’을 한 것이다.
불필요한 예산을 줄이라는 취지와 달리 필요한 곳에서 예산을 절감했다가 재활용해 실적을 올리기도 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이공계 장학금 24억 원과 학자금 이자 보전비용 35억4000만 원을 절감했다가 같은 금액을 재투입했다.
○ 절감한 돈 다른 곳에 쓰기
절감한 예산을 경제 살리기와 무관한 곳에 쓴 부처도 적지 않았다.
외교통상부는 절감한 돈 중 6억 원을 공관장 회의 및 겸임국 출장비로 썼다. 외교부 관계자는 “공무원 여비 규정이 바뀌면서 올해부터 체재비를 실비로 지급하게 됐다”며 “회의를 호텔에서 열다 보니 비용이 늘어 이를 충당했다”고 설명했다.
국방부는 11월 말까지 절감한 예산 2303억 원 중 절반가량인 1078억 원을 기름값 상승으로 인한 초과지출과 환율 변동에 따른 환차손을 보전하는 데 사용했다.
교과부는 교육차관을 상환하는 데 25억2200만 원, 교원소청심사위원회 대강당을 보수하는 데 2억200만 원을 썼다. 보건복지가족부는 절감액 중 87억 원을 청사 이전에 따른 임차료로 사용했고 문화체육관광부는 청사유지관리비로 3억9100만 원을 썼다.
이 밖에도 상당수 부처는 절감액을 △환율 변동에 따른 환차손 보전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사업비 보전 △감원에 따르는 명예퇴직 수당 등으로 사용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대부분 경제 살리기와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다.
○ 사실과 다른 보고
일부 부처가 제출한 자료는 사실과 달랐다.
통일부는 개성공단 전자태그(RFID) 시스템 운영비를 2200만 원 절감했다가 재활용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개성공단사업지원단 관계자는 “절감한 사실만 있고 다시 활용한 사실은 없다”고 말했다. 법무부는 사회복무제 도입과 관련해 4억5000만 원을 썼다고 밝혔지만 해당 부서에서는 “모르는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보건복지가족부는 책정된 예산 중 미처 다 쓰지 못해 남은 불용(不用) 예산을 절감한 것처럼 보고했다. 이는 쓰다 남은 불용 예산을 절감 예산으로 볼 수 없다는 기획재정부의 견해와 상충되는 것.
아예 자료가 없는 곳도 있었다. 국토해양부 관계자는 “절감 및 활용을 실국에 맡겨 놓아 점검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정부와 여성부는 정보공개를 청구한 지 3주가 지난 26일까지도 “자료가 준비되지 않았다”며 절감 및 활용 사업 공개를 거부했다.
○ 재정부 감독 소홀도 원인
재정부는 11월 말 현재 2조5000억 원을 절감해 이 중 1조5000억 원을 활용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각 부처는 대략적인 절감, 활용 실적만 재정부에 보고할 뿐 구체적으로 어느 사업에서 돈을 절감해 어디에 쓰는지는 감독받지 않는다. 편법 절감 및 활용이 일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재정부는 예산 절감이 본격화하는 내년에는 총 17조5000억 원의 예산을 절감할 계획.
재정부 관계자는 “연말까지 절감 및 활용에 대한 기준을 마련해 각 부처에 배포할 것”이라며 “이를 토대로 내년 초에 자료를 제출받아 실제로 절감과 활용이 제대로 이뤄졌는지 면밀하게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