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치와 외교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새뮤얼 헌팅턴 전 하버드대 교수가 24일 세상을 떠났다. 헌팅턴은 하버드대에 58년간 재직하며 미국 정부, 민주주의, 쿠데타, 이민과 관련된 저서를 단독 혹은 공동으로 17권 집필한 석학이다. 1996년 출간한 저서 ‘문명의 충돌’은 그의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헌팅턴은 이 책에서 냉전 이후 무력충돌은 국가 간 이념 차이가 아니라 주요 문명 간 갈등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9·11테러가 발생하자 “미국 주도의 호전적 논리”라며 한동안 비판받던 헌팅턴 이론은 다시 힘을 받게 된다. 오사마 빈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는 미국으로 상징되는 기독교문명에 근원적 적대감을 보였기 때문이다. 문명충돌론은 ‘강한 국가론’을 주장한 프랜시스 후쿠야마 존스홉킨스대 교수를 비롯한 네오콘에게 영향을 미쳤다. 테러와의 전쟁이나 이라크전쟁에 대한 조지 W 부시 정부의 외교정책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되기도 했다.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문명 간 분쟁의 3분의 2에서 4분의 3이 이슬람교도와 비이슬람교도 사이의 싸움”이며 “이슬람과 전투성 사이에는 명백한 연관성이 있다”고 이슬람 문명권의 호전성을 비판했다. 헌팅턴이 사망한 지 사흘째인 27일,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지배하는 가자지구에 100t의 폭탄을 퍼붓는 대공습을 감행해 1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팔레스타인에서 생긴 가장 많은 사상자다. 하마스가 휴전 연장을 거부하고 이스라엘 남부지역에 로켓탄을 잇달아 발사한 데 대한 대규모 보복이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이번 사태의 책임은 휴전을 깬 강경 무장정파 하마스에 있다”고 했다. 반면 휴전을 중재하던 이집트는 이스라엘군의 공격을 “전례 없는 대량학살”이라고 규정했다. 터키는 “국제평화를 저해하는 폭동”이라며 비난했다. 문명권에 따라 이번 사태를 보는 눈이 이처럼 다르다. 양측의 무력충돌에는 오랜 영토 분쟁 및 이스라엘의 국경 봉쇄로 인한 팔레스타인의 경제난 같은 복잡한 요인이 얽혀 있다. 그렇지만 그 뿌리에는 중동지역에서 오랫동안 경합한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배타성이 자리 잡고 있는 것도 틀림없다. 헌팅턴의 통찰이 빛나는 대목이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